brunch

프롤로그. 설섬행 비행기

by 킴 소여

이륙하는 비행기 창밖으로 가득한 고층 건물들을 보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메마른 느낌.


이렇게까지 힘들게 이주해야 하나?

제주살이 3개월로 충분하지 않았나?

평생 살던 곳을 굳이 떠나 부모님들께 손주를 자주 못 보는 불효를 하면서까지?

그렇다고 딱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거리도 없는데..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던 터라 지친 신체는 정신까지 갉아먹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인지,

왜 원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좌석에 묻어 잠을 씻을 때쯤 앞 비행기로 인해 상공에서 착륙 대기 중이라는 방송이 나온다.


'벌써 다 온건가?'


의자에 이대로 몸을 묻고 싶은 마음이 커 계속 대구도 제주도 아닌 이 어중간한 공간에 둥둥 떠있고 싶다.


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착한 이곳.

다시 돌아온

제주.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한 달 새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깜짝 놀란다!

못 보던 사이 왕권이 바뀌어버린 이곳.

설산으로 변모한 왕 '한라산'.

그는 온 세상을 안을 듯 지엄히 두 팔을 벌려 길게 우리를 맞아준다.

설섬이 되버린 제주도의 예상 못한 환영식에 기억상실증 환자는 모든 답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내가 왜 그토록 이곳을 고집했는지.

멀쩡한 사랑니 빼듯 편안한 고향을 왜 고생을 사서 하면서까지 빼버리고 와야 했는지.

잠시동안 잊고 있던 모든 이유를 생각나게 했다.


온 세상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는 설산의 위엄에 고개를 숙이며 흔들리던 모든 잡다한 고민들이 사라진다.


제주여야만 했다.

이 자연 곁에서 나 또한 사람이 아닌 '자연'일 수 있는.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내 인생 가장 주체적인 선택.






.

.

.



제주행 야간비행기 2탄.

<설섬행 비행기>가 시작됩니다.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plus1500/221185624384?photoView=0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