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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 소여 Oct 27. 2024

독감 릴레이

그리고 4일간의 독방

금요일 아침. 전날 밤부터 첫째 율이가 열이난 탓에 둘 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 병원에 가니 일반 감기약을 지어줄 뿐이다. 약을 먹어도 밤새 전혀 진전이 없고 39도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토요일 아침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한번 더 가본다. 코로나와 독감검사를 해보니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고열과 구토로 기운이 빠지고 독감에게 눈 속 반짝임까지 빼앗긴 아이의 상태와는 무관하게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11월이라고 믿기지 않는 25도 안팎의 바람도 없는 쾌청한 날씨. 평소라면 바깥나들이를 가고도 남을 테지만, 아이가 아픈 지금 할 수 있는 라곤 집 마당을 서성이다 의자에 몸을 묻는 도이다.


아름다운 가을 구름들의 뭉실한 뭉침도, 우아하게 흔들리는 갈대들도, 장난스러운 바람결도

모두  취소된 파티에 폐기를 기다리는 최고급 요리들처럼 무상하다.

물론 이 아픔이 끝나리란 건 알지만 이는 나로선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름답게밖에 보이지 않았던 제주가 아름답지 않아 보였던 건 처음이었고, 이럴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오랜 회사생활에 찌든 도시인이 만든 환영이었던 건 아닐까..?


이곳은 그대로인데, 자연은 가만히 한결같은데, 나 혼자 숭배했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었다가..

내 정신이 문제인가라는 생각까지 이르고 있는 찰나 율이가 마당 의자에 앉아있는 내 옆에 힘없이 다가온다. 손에 무언가 들려있다.


스케치북색연필이다.


약을 먹고 한숨 자곤 기운을 조금 차렸는지 그림을 그리러 엄마 옆에 나온 율이를 보고

"엄마랑 같이 그릴까?"

묻자, 원하던 바였다는 듯이

"응~"

대답한다.

모자가 나란히 마당 의자에 앉아 풍경화를 그린다.

엄마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는 율이는 힐끗힐끗 따라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용히 관찰하고 그리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나 평온하다. 아이가 아프다고 괜히 주변 비난하던 자신이 부끄러워 질정도로 아이는 순수하고 따듯하였다.


그러곤 방에 들어가 좋아하는 블록 놀이를 한참 하더니 보여줄 게 있다며 나를 부른다.


짜잔~~ '갈대들'라고 한다.ㅎㅎㅎㅎ

이걸 보고 어떤 부모가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이어서 제법 진지하게 모자를 쓰고 물 조리개로 물을 주는 퍼포먼스까지 보인다.

누군가의 말대로 모든 아이들은 '최고의 예술가'라고 했던가. 아이의 순수성과 창의성은 어른의 노력으로 이길 수 없는 것만 같다. 어른은 아이에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


어느덧 따잠에서 깬 둘째 찬이는 독감 걸린 형아덕에 얼떨결에 같이 독방신세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른의 생각일 뿐. 아이들은 독방도 놀거리로 가득하다. 혼자 조용하여 찾아보니 뒷마당 수돗가에서 한참 동안 물놀이에 골똘히 빠져있다. 가을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줄기들과 풀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비현실적이게 눈이 부시다.

찬아 뭐하니~
물 장난이욤 :D


독감 셋째 날에 접어들면서 율이는 구토 횟수도 줄어들고 컨디션이 회복되어 가 보인다. 반면에 뒤늦게 옮아버린 나는 율이의 증상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오늘로써  셋째 날이자 독 셋째 날. 

약기운의 탓인가 이상하게 갑갑하지 않고 나른 포근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집에서 머물 시간을 강제로 주어진 게 고마울 정도다.(물론 아프지만 않다면.. ) 주말이 주어지면 어디론가 나가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덕분에 이 아름다운 집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

'그래.. 이 숙소에서도 이제 일주일정도 시간이 남았구나..!' 

거실 소파에서 통창밖을 보며 멍하니 감상에 젖은 내게 율이가 조금 올라간 컨디션으로 마당을 뛰어다닌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비해 잠옷만 입은 율이가 걱정돼

"율아 안 추워??"

라고 묻자 바깥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에 손을 모으고

"뭐라고??"

"춥지 않냐고?"

"뭐라고???"

를 세 번 정도 주고받고야

"응 안 추워~~"

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바람막이를 챙겨 들고나가자,

웬걸? 아이 말대로 춥지 않고, 처음 겪어보는 신기한 촉감이 온몸을 감쌌다.

겉으로만 쌔보이는 외강내유 바람은 미지근하고 습한 공기와 만나 강하게 불어온 바람이 막상 피부에 닿을 땐 수분과 함께 물컹 부서져 묽은 수분크림을 도포하듯 부드럽게 피부를 감싼다.

바람이 잠시 멈출 때는 약간 덥기까지 해 바람의 공격이 기다려졌다.

11월에 이런 나약한 바람이라니.

여름의 후덥한 바람도, 겨울의 매서운 바람도, 그렇다고 가을의 쾌청한 바람도 아닌 이런 물커덩(?)한 바람은 난생처음 맞아봤다.


톡.톡.톡.톡

처마 끝 어딘가에서 일정하게 반복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사찰의 목탁소리를 연상시켜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그리고 현재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며 관화하게 된다.

이제 이 숙소에선 마지막 일주이고,

제주살이는 마지막 달이 남은 시점.


두 달 정도 놀고 나니 이제 조금은 마냥 놀기만 하는 것보단 적당히 생산적인 보람감에 갈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나마 '브런치'는 지금의 무의 상태에 작은 첫걸음으로 할 일이 되어주지만,  좀 더 과 일의 밸런스를 잡을 수 있는 일을 갖고 싶어 진다. 그래야 노는 것도 더 재밌으니까. (음식도 단짠이 진리이듯)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일독이 쌓여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고 싶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런 시기가 지나갔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그럼

무얼 해야 하고,

무얼 하고 싶은 걸까.


갑자기 두터운 구름에 숨겨있던 태양이 온몸을 드러내 햇볕이 눈을 어지럽힌다.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려 부랴부랴 튀어나온듯한 모양새다.. 갑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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