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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샘 Oct 14. 2021

오늘도 B급 교사는 출근합니다

B급 교사 인생이지만 오늘도 살아남았습니다.

  

 스르륵-.

1학년 수업 중 문이 열린다.

 “교장 선생님! 온라인 수업 중입니다. 제가 끝나고 찾아뵙겠습니다.”


 띠리리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수업 중인 학생들에게 미리 말을 해 놓았기 때문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계속 벨이 울리면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수업 중입니다. 메시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딸깍)”


“여러분 정말 미안해요. 오늘 3학년 전체 등교인 거 알죠?
계속 방해가 돼서 미안해지네...
남은 시간은 과제 마무리하고, 모두 한 사람은 퇴장해도 됩니다.”


 똑똑똑.

 

다시 열리는 보건실 문을 보니, 3학년 담임이 00 이와 함께 왔다.

“보건 샘, 우리 반 00 이가 두통이 계속 있어서요. 데리고 왔어요.”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내 표정을 보며 학생은 무언가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하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내가 근무하는 보건실은 여러 학생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그래서 코로나-19로 증상이 있는 학생은 별도의 공간에서 관찰을 한 뒤 귀가시키고 있었다. 그중에서 두통은 가장 흔한 임상증상이었다. 발열이 없는 두통은 가장 흔했지만, 지금은 코로나 상황의 학교. 매뉴얼대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증상이 있는 아이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애를 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느낌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등교 수업 전 그렇게 연수를 하고, 이야기를 전해도 꼭 이렇게 본인만의 나름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샘들이 꽤 있었다.


 학교에서는 ‘담임’ 교사를 가장 우선으로 대우해준다. 20명이 넘는 사춘기 아이들을 담임 혼자 통솔하기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로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담임들의 업무도 많이 늘었다. 잠에 취하는 아이들을 깨우기 위해 출근하면서 정작 본인 자녀를 챙기지 못했다는 한 선생님의 말이 내 머리에 스쳤다. 나는 보건실로 찾아온 담임 체면을 깎을 수는 없기에 어금니를 악 물고 말했다.


 “선생님 착용하신 일반 마스크는 이 KF-94로 바꾸시고요. 학생이랑 2m 거리 두고 2층에 일시적 관찰실로 가 계시면, 제가 곧 가겠습니다.”


 “저도 곧 수업이라 빨리 와주세요.” 천연덕스러운 담임은 본인의 행동이 잘못된 줄도 모른 채 학생을 데리고 갔다. 그나마 본인이 학생을 챙기는 교사들은 나은 편. 그냥 학생을 덜렁 보건실로 보내는 샘들이 수두루 빽빽이다.




 중3 학생들의 등교 수업 날, 이날 나는 ‘내 몸이 딱 2개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등교 전 자가진단부터, 전체 학생에게 실시간으로 수업을 했다. 예전 같으면 강당에 모아놓고 한 번에 했으면 끝났겠지만 동선과 모이는 것을 최소화해야 했기에  짧고 굵게 끝내야 했다. 좋은 그림으로 학부모께 보여주길 좋아하는 웃어른(?)들 의중도 살피며, 동시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각 반에 들어가는 수업 대신 온라인으로 한 번에 모든 반을 수업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이 결정이 나를 울리게 될 줄은...


 미리 점검을 해 두어도 화면이 잘 나오지 않는 통에 나는 500미터 질주를 하듯 3학년 교실로 달려가 다시 컴퓨터와 빔을 점검하고 내려와 수업을 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유증상자 파악부터 학생들을 상태를 직접 확인해야 했다. 바로 보고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윗어른들 덕분에 전화는 언제나 불이나 있었다.


 이리저리 불려 가고 회의를 하지만 아직도 보건교사인 나는 학교에서 아픈 아이들을 당연하게 돌보는 사람 정도로 가볍게 취급되었다. 점점 나아진다고 하는데, 그 가벼운 존재감의 벽은 더 크게 느껴졌다.


“한 선생, **가 안 왔는데…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한 선생, @@이 부모님이 확진자랑 접촉한 동료랑 같이 근무했다고 하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하지?”


 매뉴얼도 제대로 없고, 수시로 바뀌는 통에 이렇게 대답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일들이 자꾸 일을 느려지게 해서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생님, 저 복통은 아니고 설사를 계속해요.”

 “보건 샘, 저 마음이 아파요.”


 정말 다행인 건, 그동안 교육을 잘 받은 우리 아이들은 - 물론 아닌 학생들도 ‘소수’ 있지만 - 어른들보다 훨씬 나았다. 단순하게 아픈 아이들은 간단한 처치를 해준다. 몇몇 단골들은 학생 스스로 셀프 처치를 했다. 몇몇 아이들과는 마음을 다독이며 ‘우쭈쭈~’하듯 마음의 반창고를 붙여주기도 했다.




 소규모 중학교에서  220여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나의 힐링타임은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자주 생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었다. 특히 복도 멀리서 학생들 지도를 하다 보면 목소리가 쉴 정도였다.


 “자가진단 했지?” 늦게 등교 한 학생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확인했다. 지각을 자주 하는 아이들 중에 아침마다 만나는 학생을 보며 한 숨을 크게 내쉰다.


 “턱스크 누구야!!” 마스크를 제대로 끼지 않은 학생들만 눈에 보인다. 숨을 돌릴새도 없이 발견한 녀석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아이들의 모습보다 마스크만 보이는 내가 싫어진다.


 “거리두기 합시다. 응!?” 팔짱을 끼고 다니는 사춘기 애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래도 다시 달라붙는 아이들을 알면서도 내가 할 도리를 잔소리로 대신한다.


 “야!! 복도가 화장실이야?! 칫솔 빼. 입 다물고 화장실로 간다 실시!” 양치를 복도에서 돌아다니면서 하는 습관을 못 버린 아이들을 만나면 절로 군대식 기합이 들어갔다. 육두문자가 나올뻔하는 걸 겨우 참는다. 


 “한 선생, 나 몸이 좀 이상한데 보건실에서 좀 쉴게요.” 몇몇 선생님들도 무리해서였는지 출근은 해야겠어서 왔다가 쉬는 시간 겨우 쉬는 경우도 있었다.


 홍길동처럼 신출귀몰 온 학교를 휘젓고 다니는 통에 점심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모든 전화를 받아서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통에 잠을 잘 때도 전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불면증으로 몇 달간 고생하면서도 나는 견뎌내고 있었다. 학교에 단 1명뿐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이 날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퇴근 전. 주말을 맞이하며 신이 날 법도 한데 나는 공문을 확인하고 진짜 불타는 분노의 금요일을 맞이했다. 수시로 변경되는 지침과 매뉴얼. 빨리 보고하라고 재촉하는 수많은 메시지와 전화. 뉴스로 먼저 듣게 되는 교육부의 긴급 발표들로 진짜 분노에 불타오르는 금요일이 되었다.




 결국 월요일 출근 전,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등 위로 눈물이 수없이 흘렀다. 주말에도 유증상자와 보고를 했다. 담임에게 접촉자 연락을 받고, 전화하며 사안을 조사하고, 다시 보고를 하다보니 폰을 쳐다보기 싫을 정도였다. 감염병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텐데... '혼자 다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왜 학교에 가야할까?' 라는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교사는 철밥통"

 "보건교사는 꿀이죠. 편하잖아요"


 코로나-19 이전에도 이런 말들을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울면서 집을 나섰던 그날의 출근길, 내가 왜 학교에 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나는 학교에 갈까?"


내가 지칠 때마다 일으켜 세워준 건 우리 아이들이다. 지금도 학생들을 만날 때가 가장 힘이 생기고 보람이 있다.


 "보건샘 수업 바뀌었어요? 안 돼요. 수업 해주세요."

 "보고싶었어요! 선생님"

 "나무샘, 책 재미있는데요?"


 생각만해도 미소를 짓게하는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출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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