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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지에서 책과 휴대폰

(시대의 변화)

by 박선영 Jan 20. 2025

   

외국 영화를 보면 꼭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해변에 있는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장면들이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고 내가 그 안에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 주고

눈이 부시게 따뜻한 햇살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노라면 

마음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슬픔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곤 하다.


나에게 설렘을 주었던 영화 속에서의 장면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그 공간에 있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라도 꼭 경험을 해보자고 다짐한다.

직접 경험을 해 본다면 내 안에 슬픔과 대면하고 치유가 될까 궁금해진다.



20대 영화에서 느꼈던 여행의 로망은 여유로움이었지만

그런 여행을 하기에는 에너지가 넘쳐 나기도 하고

사실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여유로움을 찾아보기 드물었고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져 있어 

여행도 일상생활이 연장이 되는 여행이 아닌가 싶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구경을 한다기보다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곳의 명소를 빨리 돌아야 하고

하나라도 빼놓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놓여있기도 하다.

카메라에 셔터를 쉬지 않고 누르고 

그 지역의 유명 맛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도 하루가 부족했다.


일상과 여행이 여유롭지 못해서 인지

한국영화에서는 외국영화에서 보던 

여유롭게 해변에서 책을 읽는 장면은 없었던 것이다.     


꿈궈왔던 여유로운 여행을 잊은 채

젊을 때는 친구들과 여럿이 어울리는 여행에 신나고 들떴었다.

혈기 왕성한 20대의 여행이었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몸이 더 피곤했다.     

물론 정신적 스트레스는 해소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던 중 30대 초반에 호주의 케언즈라는 시골에서 1년 정도 살게 됐는데

낯섦도 잠시뿐, 

처음으로 느껴보는 포근하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외국 시골 원주민들이 살법한 빌딩이 아닌 높이가 낮고 넓은 집.

나무 위에 피어 있는 꽃.

편의점도 상점도 찾아볼 수 없는 아기자기 한 동네.

그곳에서는 빨리빨리라는 문화가 없었고 

생활방식이 여유로웠고 

먹고살 만큼만 일을 하고 

욕심 없이 사는 모습과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건넨다. 

Hi, How are you?


굳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이런 모습이 진정한 여유로움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하는 장소인 것이다.     


눈이 부실정도로 맑은 파란 하늘에 둥실둥실 흰구름은 

만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고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은 콧속을 간질여 폈다.


바닷가 앞에 있는 라군이라는 수영장을 바닷물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언제든 누구든 무료로 이용할 수가 있다.     


영화에서만 봐오던 장면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판타지가 리얼이 되어 내게 다가왔다.





해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유로운 외국인의 모습.


바닷가 근처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펴고 


밥을 먹기도 하고 누워서 선탠을 하고 있는 모습.


발코니가 있는 2층 집의 의자에 기대어 책 읽는 모습.


365일 여름인 그곳에서 일 년을 살면서 


꿈에 그리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따라 해 보았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내가 원하던 삶.


여유로운 생활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여행을 하는 건지 

제2의 육아를 하러 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갈 때마다 책을 챙겨가곤 했지만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고

넣었다 뺐다 하는 하나의 일거리로만 남았다.

호주에서의 영화 같은 생활은 더 이상 현실에서는 없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여행이 짐이 아닌 여행다운 여행이 되는 시기가 오기 시작했다.     


바쁘게 지냈던 일상에서 벗어나

인적이 드물고 자연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의 나뭇잎 사이로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오고

졸졸졸 계곡물소리를 벗 삼아 캠핑의자에 앉아서 오랜 시간 책 한 권을 읽었다.

몇 년이 지난 시간도 그날에 공기 그날에 햇살 그날의 소리들이 잊을 수가 없다.


책은 그 이후에 나의 든든한 여행 메이트가 되었고

가장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 

휴양지에서 외국인들과 뒤섞여 동질감을 느끼며 책을 보는 것이다.


한바탕 수영을 하고 나와 수건으로 젖은 몸을 감싸며
모히또 한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햇빛을 가리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선베드에 누워 몸에 남아 있는 물기를 따뜻한 바람에 말리며 
손에 묻어있는 물기가 책에 젖지 않게 조심히 책장을 넘긴다.





이 모습을 상상하며 책 몇 권을 캐리어에 담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전한 대기권에 왔을 때 책을 꺼냈다.

새 책의 바스락 거림을 느끼며 첫 장을 넘긴다.


수영복을 챙겨 입고 쳉이 넓은 모자를 쓰고 비치백에는 책과 선글라스를 챙겨 들고 나온다.

수영장에 있는 물 위에 떠있는 바에서 까루아를 주문하고 수영장을 둘러본다.

다행히 우리가 머무른 숙소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아서

내 로망을 실천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젊은 날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외국인이 먼저 말을 걸까 봐 

피해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간단한 영어는 할 줄 알기에 겁이 나거나 두려움이 없어졌다.

외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있는 선베드에 자리를 잡는다.

수영을 하고 나오니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칵테일이 배달되었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다.

책을 꺼내고 책장을 넘겼다.


‘이제 당신들만 책을 꺼내 읽기만 하면 나의 로망이 실현되는 거야 ‘ 속으로 외쳤다.


한참을 책 읽기에 집중을 했는데도 

도무지 옆에 있는 외국인들은 책을 꺼낼 기미가 보이지 않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게 아닌가.

1시간을 지나도 결국에는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로망은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이룰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외국인 들조차도 더 이상 종이책을 선호하지 않았고

책을 읽는 여유로움 보다 간편한 휴대폰 세상 안에 빠진 것이다.


'씁쓸한 생각이 드는 건 로망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감성은 사라지고 이성이 지배하게 된 세상 때문일까?'


휴대폰으로 보는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 읽기는 계속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우연찮게 내가 동경했던 일을 이루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쩌면 여행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함께하는 누군가와 동질감과 공감을 느껴보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환상을 갖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나는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에 설렘을 가득 안고 

오늘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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