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우습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래서 명상을 한다
‘자신을 잘 꿰뚫어 볼수록’ 더 강해진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인간의 힘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기본 계명이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나무생각, 2016
어제 오늘 비가 왔다. 오라는 눈은 안 오고 겨울이 다 간다고, 봄비가 내린다고 툴툴거렸다. 참 뻔뻔하고 철없다. 자연에게 한 게 뭐 있다고 눈 오너라, 비 오너라... 건방을 떠는지. 세상천지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짐승이 나인가 싶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기원전부터, 너 자신을 알라고 숱한 이가 외쳐댔건만 자아성찰은 가장 어렵고 더딘 일이다. 언제나 나보다는 남이 먼저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좀처럼 내 모습은 안 보인다.그래서 타인은 나의 거울이 된다. 내 의식의 반영이다.
비가 멎은 겨울 산책로는 명상하며 걷기가 좋다. 공기는 달고 흙은 부드러우며 영롱하게 맺힌 빗방울은 맑았다.
어느 날이었다.
사람들과 나눠 먹을 게 있어서 그녀에게 부탁을 했다.
"양이 작으니 몇 군데만 나눠 먹읍시다."
그녀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한다. "고마워요.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얼버무리고 끝은 뭉갠다. "녜.... 그.... "
그녀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이라 설명하지 않고, 내가 주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고맙다고 칭송하는 그 순간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냐고? 부끄럽게도 못난 그녀처럼 나도 그랬으니까.
또 어느 날이었다.
"어머.. 이걸 혼자 다 하셨어요? 너무 수고하셨네요. "
"네... 아... 뭐.... "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함께 한 일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 순간의 유혹이 그녀를 나약하게 만든다. 나는 그녀의 거짓말이 조금 역겹고, 마치 나는 공명정대한 사람인 것처럼 그녀를 비웃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분명 나도 그랬다. 남의 영광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이 비겁함이 낯설지 않다. 너무나 작고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일상에서 우리는 번번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인다.
그녀는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딱 열등감 크기만큼 저 밑바닥부터 차고 넘쳐 오른다. 그래서 그녀는 생색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곤란한 입장이 되면 그녀는 화를 내며 변명을 한다. "그게 아니라... 아니... 사실은... 저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 제가 잘못했네요." 그 한마디는 왜 그렇게 힘든 것이었을까.
그녀는 가면을 지키는데 힘을 다 쏟는다. 그러다 보니 생각할 게 많아진다. 생각할 것이 많고 지킬 것이 많은 만큼 그녀는 아주 예민한 성격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항상 몸이 아프고 약하다. 소화기가 약하고 두통도 있다. 자기도 모르게 이중 삼중의 마음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느린 걸음으로 하늘을 본다. 대체 그녀의 삶은 무엇일까?
그녀는 한 번도 자기가 무너지는 두려움을 극복한 적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두려움 앞에 마주서지 못한다. 명상은 용기를 내어 두려움을 마주하는것, 그 두려움이 종이호랑이였음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인정해주는 타인이란 또 어떤 존재일까.
"남들 만큼만 해라, 남이 볼까 무섭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 이건 무슨 말일까.
그런 관념 관습 때문에 생긴 열등감과 비굴함과 쪼잔함이 나의 모습이라면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쉽게 얘기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라. 남과 비교할수록 비굴하게 살게 된다. 자기 삶을 살아라."
틀린 말은 아니다만 언제나 언제나 말은 너무 쉽다. 아들러의 책이 수도 없이 팔려 나갔지만 여전히 우리는 끝도 없는 비교와 열등감과 우월감 속에서 괴로워하고 병도 생겼다. 글을 읽어서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을 무시한다면 그건 미친놈이다. 사회성은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니까. 멘탈 갑,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살자는 것도 아니다. 디오게네스는 모든 관습과 편견을 조롱했다. 사람들은 그를 개 같은 철학자라 불렀다. 그래서 견유학파의 원조가 되었다. 그는 통 속에서 거지로 살았고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차마 여기 옮길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개무시하며 살았던 일화도 있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아다닌 그를 플라톤은 이렇게 불렀다. '미친 소크라테스'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을 밑바닥에 숨겨두고 사는 못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은 좌절감과 우울을 동반할 때도 많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무리에서 튀지 않게, 남다르지 않게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자유로운 것 같은 착각이 생기니까.
자유는 모방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먼저 '너 자신을 알아야' 자기 한계를 넘을 수 있다. 자아성찰은 나르시스처럼 물속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아니다. 그건 자기라는 늪에 빠져 죽는 것이다. 그래서 명상이 필요하다. 해답을 찾기 전에,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부터 던져야 하니까.
고맙게도 내가 살았던 삶의 기억은 뇌에 저장되어 있다. 하나하나 돌아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명상이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가면과 허영기가 쫙 빠지고 나면 진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머릿속이 비워진 만큼 허허로운 빈 들에서 자유도 느끼게 될 것이다. 풍요로움은 비어있는 그곳에 있다. 골 아프게 분석할 것도 없다. 명상은 의외로 쉽고 그 열매는 달다. 허욕에 매달리지 않게 되면 당연히 밀도 있는 하루를 살게 될 것이다. 행복하고 품위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