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안 보고 싶은 그림을 하나 고르라면? 그건 <쾌락의 정원>이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 (1450~1516) 작품이다. 이렇게 기괴하고 불쾌한 그림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매거진의 마지막 작품으로 <쾌락의 정원> 중에서 <지옥도>를 골랐다.
나는 왜 보쉬의 그림을 외면하고 싶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보쉬의 탓으로 돌렸다. '보쉬의 그림이 워낙 유별나고 괴이하고 불쾌하니까. 나의 문제는 아니고...' 그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명상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할머니가 딸의 권유로 명상을 하러 가셨단다. 할아버지 때문에 마음에 골병이 들었던 것이다.
도움님이 말했다. '마음을 버리면 할아버지도 용서가 될 겁니다.'
할머니는 발끈하셨다. '그놈의 영감을 용서한다고? 나는 못한다."
그러고는 나가버리셨다 한다.
사람은 무엇이 자기를 돕는 길인지 잘 모른다. 보고 싶지 않은 그곳에 내가 알아야 할 진실이 숨어 있다. 그러나 '불편'이라는 첫 번째 관문을 넘어서기가 힘든 것이다. 돌아보면 할머니를 안타깝게 여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쉬의 그림은 인간의 밑바닥 욕망, 추악한 거짓, 위선과 타락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장 어둡고 내밀한 나의 내면을 강제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너도 여기 있잖아?' 하는듯한 보쉬의 조롱이 너무 불쾌한 것이다. 불편함은 진실의 문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고, 두려움이다.
이 작품은 3폭 제단화로 그려졌다. 당대의 종교화는 매우 엄숙하고 사실적이었다. 이렇게 해괴한 그림을 그린 사람도 기이하지만, 그걸 수도원 제단에 올린 사람도 예사롭지 않다. 쾌락의 정원은 마드리드 근교의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있다가 지금은 스페인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단화 얘기를 조금 더 하겠다. 위의 그림은 네덜란드 사람, 얀 반 에이크 (1390년경-1441)가 그린 <헨트 제단화>다. 그는 북부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작가로 궁중화가였다. 가운데 황금관을 쓴 분이 재림 예수다. 양 옆으로 마리아와 세례요한이 있다. 그 옆으로 천군천사들이 합창을 하고 있다. 끝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다. 아래쪽 그림에는 제단에 바쳐진 어린양과 생명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알현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얀 반 에이크의 제단화는 중세의 무표정하고 도식적인 그림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유화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매우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했다. 얀반 에이크 그림에는 등장인물이 제각각 다르게 생겼다. 인간의 감정도 느껴진다. 사실적이며 인간적이라는 말이다. 이것만 해도 엄청나게 진보적이었다. 신성을 인간성으로 해석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쉬의 제단화를 비교해 보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쉬의 그림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다.
보쉬의 그림에 영향을 받은 그림은 많다. 당대의 화가들이 그의 그림을 모방해서 그렸고, 북구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브뤼헐도 보쉬의 그림을 베껴 그리며 공부했다. 놀라운 것은 20세기 초현실주의다. 그들은 보쉬의 그림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보쉬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토록 전위적인 그림이 먹힐 수 있었을까?
중세 가톨릭 교회는 거대 권력이었다. 그리고 부패했다. 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하고, 수도사들은 권력에 눈이 멀고 타락했다. 귀족과 교회는 특권을 누리며 사치와 권력을 탐했으나 평민과 농민은 세금과 전쟁, 질병에 시달렸다.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줄어들어 살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보쉬가 살았던 15~16세기는 중세 말기의 불안과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정통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던 네덜란드에서 교회는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확산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전쟁과 흑사병 때문에 죽음과 종말에 대한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종말의 불안이 커질수록 인간의 죄, 탐욕, 위선에 대한 내면성찰의 욕구도 강했다. 이를 반영하여 형제단 운동 등의 결사체가 만들어진다. 가끔 형제단을 이단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그림은 기괴하고, 워낙 자료가 없기 때문일거다. 그러나 형제단은 로마 가톨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단체로 지역사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형제단 운동(14세기~)에는 당대의 부유층과 지식인,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나아가 종교개혁의 정신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보쉬는 1488년, 노트르담 형제단의 정회원이 되었다. 그는 그림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았다. 인간의 불안한 내면과 갈등을 직시하고, 자기 성찰을 촉구하는 시대적 메시지였다. 그는 당시 사회의 부패와 인간의 죄악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쾌락의 정원은 기괴한 그림이 아니라 당시의 타락상과 세속적인 어리석음, 탐욕과 폭력, 위선, 지옥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보쉬는 쾌락의 정원을 그리기 위해 많은 습작을 했다. 특히 지옥도와 나무 사람에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지옥도는 쾌락의 종말을 그린 것이다. 쾌락의 끝에서 만나게 될 악몽이다. 세속적 향락의 끝에서 만나게 될 심리적 고통과 심판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도시가 불타고 있다. 삶에 매몰된 인간은 도시가 불타고 있어도 모른다. 불길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형벌을 받는 사람들은 종종 악기와 함께 등장한다. 쾌락의 도구들이 고통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소리의 즐거움에 집착했던 귀는 거대하다. 그리고 집착한 만큼 큰 칼이 튀어나온다.
탐욕과 폭식의 죄는 모두 항문으로 배출된다. 욕망의 끝은 추하고 비천하다. 이 모든 형상들은 삶 속에서 외면해 온 우리 내면의 그림자다. 마음 깊은 곳의 숨어있는 불안과 욕망, 수치와 고통이다. 내면의 진실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지옥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나무 사람이다. 창백한 나무 인간은 속이 텅 비어있고 부서져 있다. 몸통은 계란 껍데기같이 부서져 있고, 선술집을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15세기 네덜란드의 선술집은 술과 도박, 매춘과 사기가 빈번한 타락의 상징이었다. 선술집 내부의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고 인식도 못하고 있다.
나무인간의 다리는 부서지고 붕대를 감고 있다. 몸집에 비해 너무나 작은 조각배에 의지하여 물 위에 떠 있다. 균형을 잃고 방향도 잃은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붕괴 내지는 침몰 직전이라는 사실이다. 구원의 배가 아닌 표류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쾌락의 유혹에 순순히 응하며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다.
나무인간은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에는 심장이 있고 나팔처럼 생긴 확성기가 달려있다. 욕망의 증폭 장치인지도 모른다. 멸망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 모자는 그들만의 향락의 무대가 되었다. 행복하고 즐거운 것도 아니다. 습관적 쾌락이고 중독이다.
나무인간은 부서진 자아를 상징한다. 내면은 텅 비어 공허하다. 빈껍데기를 쾌락과 욕망으로 채우고 있다. 지옥 한가운데에서도 쾌락의 세계는 지속되고 있다. 철저한 자기기만이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유일한 존재가 나무인간이다. 창백하고 냉소적인 미소를 나에게 보낸다. 여기, 이 지옥에 너도 있어. 이게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