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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미술의 아우라

감동은 어떻게 오는 건지 궁금했다

by 냉이꽃


눈길이 딱 멈추게 하는 미술 작품이 있다. 간직하고 싶은 감동이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어떻게 이런 것이 있을까 싶은 것이 있다. 에게 미술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케네여인아크로폴리스13세기.jpg 미케네 여신,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 기원전 1300년 / 출처 :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아름다움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돌아가신 할머니는 삐쩍 마른 여자는 못쓴다며 혀를 찼다. 그렇듯이 선사시대에는 얼굴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잘 낳고 잘 키우는 몸매 풍성한 여자가 최고였다. 나도 나의 생존을 보장해 줬던 엄마가 미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 차가운 것보다는 따뜻한 게 좋고, 빈한한 것보다는 풍요로운 게 아름다워 보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이 생겼다. 실물과 얼마나 닮았느냐였다. "진짜 똑같다!"는 "최고다, 나는 감동받았다"는 말이었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그리스 사람들도 이런 걸로 감탄했다는 얘기가 있다. '나의 포도 그림에 새가 날아와 쪼아 먹더라. 너의 그림도 보여줘. 천을 걷어 봐.' 했다. 화가가 '그 천은 그림이야' 그랬다는 거다. 천을 그린 화가의 勝이었다. 한 사람은 새를 속였고, 한 사람은 화가를 속였기에. 참 단순하지만 아름다움의 인식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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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던지는 사람, 사진출처 :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사진출처 : 루브르 박물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름다움


먹고사는 일에서 벗어난 그리스는 철학을 시작했다. 쌍벽을 이루는 미학 이론도 나왔다. 플라톤의 '향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유명한 '시학'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것은 '비례, 조화, 균형, 절제'로 표현되었다. 현실 세계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은 이데아의 그림자의 그림자라 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리스 클래식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다. 창던지는 사람은 신체의 이데아를 구현하고 있다. B.C. 2C, 밀로의 비너스는 감각적인 표현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절제된 감정을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이 인간의 본성이며 재현된 것에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 쾌감은 의미를 알고 배우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아하, 라오콘은 인간의 숙명적인 비극을 그린 것이야. 이 표정과 근육과 핏줄을 봐!' 이런거다. (시학 4장) 낮은 단계의 미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 속에 있으며 (시학 7장), 연민과 두려움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가 비극의 목적이라고 했다. (시학 6장) 니케의 여신상, 라오콘 군상과 같은 작품이 여기에 해당한다.



IMG_2631-1920x988.jpg 기원전 2800-2300, 키클라데스 조각상, 사진출처 :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에게 미술의 아우라


에게 미술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이론에서 비껴 있다. 그들은 자유롭다. 삶을 즐기고 즐거운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에게해는 기후는 온화하고 바다는 풍요로웠다. 섬과 섬끼리 무역과 문화 교류가 활발했으며, 섬마다 고유의 문명이 살아 있었다. 에게해는 아름다웠고,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며 밝고 경쾌했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미술 작품을 보면 행복하다. 에게 미술은 단 하나의 시간과 단 하나의 장소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향기다.


<에게 문명>

1. 키클라데스 문명 (B.C. 3200~2000) : 키클라데스 제도 39개 섬, 에게해 교통의 중심
2. 미노스 문명 (크레타 문명 B.C.3600~1170 ) :크놋소스 궁 (미노스 궁)
3. 미케네 문명( B.C.1600 ~1100) : 그리스 본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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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클라데스 조각상, 사진출처 :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온화한 키클라데스 미술


에게 미술 중에서 키클라데스 제도의 미술에 나는 끌렸다. 밀로의 비너스가 출토된 밀로스섬,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토리니 섬이 이 문명권에 속한다. 키클라데스 제도의 상징은 바다를 닮은 푸른 지붕과 햇살을 닮은 하얀 집이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다. 여기서 나온 예술이니 오죽하겠나.


그들은 하얀 대리석에 온화하고 정제된 여인을 조각했다. 키클라데스를 대표하는 청동기 미술이다. 여신인지 무덤 부장품인지 확실치는 않다. 절제된 고요함이 있고, 음악처럼 흐르는 유려함이 있다. 그리고 낙천적이다. 현대 미술 못잖은 모던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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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섬 (현 산토리니) 에서 출토된 벽화, 사진출처 :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들


이 작품은 산토리니 (옛 이름 : 테라, 고대 아크로티리 미술 )에서 출토된 프레스코화다. 기원전 1660년에 화산폭발로 침수되었다. 산토리니는 해양 무역으로 번성한 도시였다. 매우 풍요롭고 자유로우며 유연한 문화를 형성한 것 같다.


화산재 덕분에 잘 보존된 벽화. 어린 소년(혹은 소녀)들이 권투를 하고 있다. 머리나 장식으로 봐서 상류층 소년들이다. 비례와 균형이 좋은 신체로 매우 아름답다. 고대 미술에서 어린 소년이 단독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부장적이지 않고 평등하고 안정된 사회라는 반증이 아닐까.


두 번째 그림은 신전에 공물을 가져가는 어부다. 날치를 양손 가득 들고 가는 모습이 무척 밝다. 키클라데스 사람들은 신과 영웅 대신 어린 소년과 어부를 그렸고, 평범한 일상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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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 궁 돌고래 벽화, 뛰어노는 날치 , 기원전 1600~1500년, 사진출처 :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지중해의 돌고래와 날치다. 춤을 추듯 헤엄치는 광경이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즐겁다. 이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풍요의 원천이다. 싸움보다는 평화, 경쟁보다는 조화, 통제보다는 자유가 더 돋보이는 문화다. 그래서 에게 미술이 자꾸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낙원이라서.




나이가 들면서 '아름답다'는 귀한 말이자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면을 벗기고 민낯을 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믿음을 깨뜨리는 사람은 나였다. 아픔을 주는 사람도 나였다. 희망을 절망으로 끌어내리는 사람도 나였다. 이 모든 진실을 마주 봐야 했다. 마주 본 삶의 이면은 추하고 기괴하고 황당했다. 보고싶은 것만 보면 절대 알 수 없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데아를 담은 이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진실을 담은 작품에 공감이 갔다. 근대 미술 이후 화가들은 이 진실을 끝까지 추적한다. 대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그 순간순간이 다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끝에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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