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때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당면한 문제가 되어 외면하기 어려웠다. 깊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허영심도 있었다. 더 늙어 후회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도 있었다.
그 시기에 알게 된 것이 바니타스 정물화, 그리고 메멘토모리였다. 어설프지만 브런치에 글도 발행했다. 고맙게도 누군가는 읽으셨고, 알게 모르게 인용하신 분도 계셨다. 얼마 전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를 주제로 한 그림을 다시 찾아보았다. 바니타스의 본산인 네덜란드, 정말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한 세기를 휩쓴 문화였고, 20세기에도 이어졌다. 그 부침의 과정을 보려고 한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사건은 잘 아실 것이다. 그 덕에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그만큼 해골이 주는 임팩트가 큰 것이다. 그런데 중세의 성직자들은 왜 이럴까? 흉측한 해골을 끼고 살았던 이유가 뭘까?
알다시피 초대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었고, 산 채로 불을 붙여 횃불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 묘지 카타콤에 숨어들었다.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그곳에서 신앙을 지켰고,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순교를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해골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였고, 죽음은 부활과 영생의 관문이었다.
313년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다. 국교의 기틀을 잡는 한편에서는 영성을 되찾자는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사들은 사막에서 은둔자로 살거나, 침묵 속에서 일하고 기도하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영적 성장을 위해 해골 묵상을 했다. 죽음을 기억하며 세속의 유혹을 이겨냈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메멘토모리는 수도사들의 인사말이기도 했다.
(좌) 해골 모양의 펜던트, 1600년 (우) Memento Mori Ring, 1620-1650
반지 가운데 성경책에는 빌립보서 말씀이 있다. 성경책 양쪽으로 날개 달린 천사와 해골, 모래시계가 있다. 반지 안쪽에는 "우리의 삶은 땅 위의 그림자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항상 몸에 지니며 죽음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14세기 유럽은 백년전쟁에 시달렸다. 전쟁은 흑사병을 전 유럽에 퍼뜨렸다. 14~15세기, 페스트가 100여 차례 유행하는 동안 7500만~ 2억 명이 죽었다. 유럽 인구의 30~60%에 해당한다. 죽음이 일상이 된 지 오래라는 말이다.
죽음은 계속되었다. 인류 전쟁사 중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은 30년 전쟁 (1618~1648)이다. 종교전쟁이었다. 800만 명이 죽었다. 동시에 마녀사냥으로 죽은 숫자는 집계조차 어렵다 한다. 4~6만 명에서 100만 명까지 추정한다. 대부분 무고한 여자들이 마구잡이로 죽었다.
그 와중에 가톨릭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이 몰락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는 80년 독립전쟁 끝에 독립을 했다. 이후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황금기를 맞이한다. 막강한 재력을 가진 신흥 상업 부르주아 계층은 종교개혁을 지지했다. 그들의 진보적 이념을 담은 문화가 바니타스 미술이다. 진절머리 나는 죽음의 경험이 그림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위선과 민낯을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은 죽음의 교훈을 뼈에 새기고 싶어 한 것 같다.
1. 바니타스 Vanitas
라틴어로 허무, 덧없음이란 뜻이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는 성경에서 유래한 말이다.
2. 메멘토모리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중세 수도사들이 해골을 곁에 두고 묵상하던 주제였다.
(좌) 해골 그림의 상단에는 메멘토모리, 하단에는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 25:13)는 문구가 있다.
(중앙) 묵상의 도구로 만들어진 기념메달이다. 해골과 두 개의 뼈는 전형적인 메멘토모리 상징이다. '죽음은 너도 데려갈 것이다'는 라틴어 문구가 있다.
(우) '죽음을 피할 길이 없으니 지금 너의 삶을 돌아보라'는 문구가 네덜라드 고어로 쓰여있다.
머지않아 너는 죽어 재가 되거나 백골로 넘게 될 것이며, 이름을 남기거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살아생전에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들은 하나같이 공허하고, 부패하고, 헛된 것들 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33, 다상, 2014
17세기 네덜란드는 종교개혁과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청빈이 주요 가치가 되었다. 엄숙한 종교화 대신 정물화, 풍경화가 처음으로 그려진다. 시든 꽃, 사라지는 물거품과 연기, 값비싸고 화려하나 덧없는 정물, 꺼진 촛불, 벌레와 해골, 썩은 음식을 그렸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 이미 썩기 시작했고 죽어가고 있는 것,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을 기억하라는 경고와 각성의 그림이었다.
바니타스 정신은 일반화되었다. 구체적인 삶 속으로 파고들었고, 인간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속속들이 드러냈다. 하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탐욕과 욕망을 막지는 못했다. 튤립 버블이라는 광기가, 대사기극이 네덜란드를 휩쓸었다. 튤립 한 뿌리가 암스테르담 고급 주택 한채 값으로 거래되면서 세계 최초의 대공황을 겪게 되었다. 그들의 욕망은 거품이 되었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네덜란드는 붕괴했다.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친 지금의 네덜란드는 성숙하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도 돼?' 할 정도로 개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자유의 쓴맛 단맛을 다 경험하면서 탄탄한 정신적 토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세계 1위다. 나라를 거덜 냈던 튤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주요 수출품목이 되어 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다.
(좌) 진주를 잔뜩 두른 여성에게 어릿광대 모자를 쓴 남자가 거울을 보여주고, 다른 남자는 해골을 보여주며 허영심을 경고하고 있다. 알렉산더 보에트, 1661-1695
(우) 반은 해골, 반은 젊은 여성의 흉상. 이미 죽음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프랑스, 1615-1664
(좌) 여성은 해골을 보여주는 남자에게 그만하라 한다. 해골을 두려워하고 삶의 본질을 외면하고 피하는 모습을 풍자했다. 샤를 필리폰, 프랑스, 1827-1829
(우) 이삿짐을 싸는 커닝엄 경, 악명 높은 조지 4세(영국)의 정부였던 부인, 기린의 뼈를 잡고 있는 딸을 그렸다. 부패와 허영을 상징하는 풍자화다. 1830
(좌) '인간의 정신적 유산은 죽음을 넘어 살아남으나, 그 외의 모든 것은 죽음의 몫이다'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다. 1725
(중앙) 담배 피우는 해골, 빈센트 반 고흐, 1886, 네덜란드 화가인 반 고흐에게도 바니타스의 피가 흐른다. 모든 계획이 무너지고 건강도 최악인 상태에서 그린 그림이다. 바니타스고 뭐고 반고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가질래야 가질 것이 없었다. 그림밖에 없어서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 손에 해골을 든 젊은 여성, 루이스 댄스, 1887
재미있는 그림이 많았지만 반에 반도 못 올렸다. 왜 이렇게 많이 그렸을까? 죽는다는 걸 모를 사람은 없다. 문제는 안다 하면서도 영원히 살 것처럼,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살아있을 것처럼, 내 계획대로 살거라 믿고 사는 인간이다. 그래서 내일을 기약하고, 미루고 산다. 지금 현재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안다고 생각하고 그냥 사는 것이 사람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무시로 깨닫는 바가 생긴다. 그러나 아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 같다. 다음날이면 깨달은 것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다. 관념적인 이해로 만족하니 머리만 커졌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 정신적 유희일 따름이다. 아는 소리는 따박따박 하지만 하는 짓은 그대로였다.
죽는 존재인 사람이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를 기억하는 것은 기본이다. '오늘이 진짜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런 마음으로 내 삶을 돌아봤다. 어제도 돌아보고 그제도 돌아봤다. 후회되는 건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단 한 사람은 누구인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돌아봤다. 투명하고 솔직하게 나를 돌아보면서 지금껏 솔직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여한 없고 후회 없는 오늘을 살려면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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