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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Jul 29. 2024

당근마켓 중독된 3박 4일간의 이야기

일단 며칠 간이라도 내가 당근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현생에서 비밀이다.


왜냐면,

카톡! 도 아니고 당근! 이라는 소리는 뭔가 나의 수줍은 가성비 모먼트를 현생에 알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그래서 늘 휴대폰이 "당근!"을 외치는 순간을 방지하기 위해 매너모드를 고정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회사에는 이런 이유를 철저히 숨겼으며, 매너모드가 콘셉트인 척하고 있다.)


이번 달부터 '갓생(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미라클 모닝과 비슷한 느낌이다.)'을 기치로 하게 된 나로서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베란다 꼬락서니 정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선반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 늘 쓰러져 있어 발에 차이는 안전문도 짱짱한 놈으로 하나가, (아니 두 개가) 필요해졌다. -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있는데 강아지가 옷방에 드나드는 걸 막기 위해 안전문을 설치해 두었다. (옷방에 들어가서 쉬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있는 안전문은 늘 누군가의 발에 의해 쓰러져, 서 있기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누워있어도 강아지가 그 위를 지나다니지 않는다. 이상하게 제 역할을 하는 바람에 늘 누워있게 되었다.-


바로 남의 당근밭 염탐을 시작했다. - 남의 당근밭 염탐이란 선반, 앵글, 안전문 따위를 검색하면서 이웃들의 매물을 탐색하는 거다.(내가 지금 지어낸 용어다)- 그 과정을 하루 거치면서 얼마나 재빠르게 사람들이 매물을 낚아채는지 그 솜씨에 감탄했다. (무료로 나눔하는 선반은 10초 만에 사라진다.)


아마 내가 물건 선정을 잘못 한 모양이지만, 물러설 길은 없었다. 하루 종일 당근밭을 째려보며 브랜드와 선반과 안전문의 종류, 길이, 선반 개수 등 사소한 것 따위까지 골라낸 나는 이제 살 일만 남은 것이었다. 고르고 고른 검색어들을 키워드 알림으로 등록해 놓고 나만의 철칙을 잠시 깨기로 했다. 매너모드를 해제한 것이다. (얼마나 큰 결심인 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알림이 울리자마자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사도 될까요?"를 보내도 새로 고침 해보면 14명의 이웃이 이미 내 앞에 대기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5개의 철제/원목 선반을 내 품에 안았다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떠나보냈다. (뇌내망상)


하지만 내가 누군가. 의지의 한국인. (남들도 한국인이다.) 3박 4일 기계적인 문구를 손가락 덜덜거리며 보냈다가 답장을 받고 만 것이다. 너무 놀라버린 나는 (소녀시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장 갈게요!"를 외친 뒤 5분 만에 물건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이날 저녁 같은 방법으로 철제 선반을 무려 2개나 구했으며(한 번에 판 것이었다), 산책을 빙자한 당근거래에 속아 (우리 집 강아지와) 어머니까지 동원되었다. (이 차는 SUV로써, 차체가 높고 많고 큰 짐이 실린다.) 물론 배달료로 어머니에게 선반 한 개를 (삥 뜯겼다=) 상납해 한 개는 부모님 댁에서 화분 선반으로 쓰이고 있으며, 잔짐이나 싣고 있는 우리 집에 온 선반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다.


이 3박 4일간의 여정으로 인해 나는 깨끗한 집과, 선반 한 개와 안전문 두 개(만 얻었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지인들에게 (기피해 마지않았던) '당근 중독자'의 이미지까지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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