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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Aug 19. 2024

E급 야매 농부, SSS급 힐러에 당하다



나는 식물을 기르는 데 있어서는 SSS급은 아니지만 태생 E급, 지금은 B급으로 진화한 손을 물려받았다고 자신한다. (적어도 일반적인 수준보다는 낫다는 뜻이다.) 외할머니는 오랫동안 과수원을 가꾸셨고, 벼농사도 지으신 SSS급인 '찐 농부'이시기 때문이다. 사과, 감, 참외, 수박 할 것 없이 할머니네 밭에서 얻어다 먹었고, 우리 집은 평생 쌀을 팔아본 적이 없을 정도다.(엥? 하는 누군가가 계실 텐데, 쌀을 사 먹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왜 이렇게 이야기한 건지 궁금하다면 붙임 기사를 참고해 보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1501142043345?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놔주지 않은 덕에 여름방학마다 손발에 흙먼지가 가실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태생 E급인 나도 SSS급인 할머니 어깨너머로 배운 나는 들이는 화분마다 잘 죽지 않고 몇 년씩 키워내며 레벨업을 거쳐 'B급 도시농부'로 진화했다. 특히 최근 획득한 '타이밍 맞춰 물 주기' 스킬은 S급이다. 일명 '파돌이'라 불리는 대파 박스는 늘 풍성하게 자라며 (파를 한 단, 두 단씩 사 와서 심어놓는 것이다.) 민트나 바질, 로즈메리 따위의 허브 종류도 화분에서 잘 적응하고 자랐다. (지금은 민트 하나뿐이다. 진딧물 습격을 받은 것을 겨우 살렸다.) 생명력이 좋은 다육이 화분 몇 개와 장미허브, 그리고 취재하다 사장님께 받은 수국 화분 두 개, 어디선가 뽑아온 야관문 한 뿌리, 선물 받은 맨드라미와 레몬씨를 심었던 것인가? 하튼 플라스틱 물컵에 자라는 정체 모를 녀석도 최근 가족이 돼 잘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SSS급 힐러에게 이 녀석들이 절단날 뻔했다.


무지막지한 힐러의 정체는 햇빛이다. 평소라면 따사로운 손길로 광합성을 도우며 강렬하게 성장을 도울 테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힐링의 손길을 느껴보라고 창문도 활짝 열어두었는데 다 타 죽을 뻔했다. SSS급의 지나친 직사광선은 내 S급 스킬인 '제때 물 주기'의 천적이었던 것이다. 물을 함빡 주더라도 흙을 금세 말려버렸다.



게다가 입추가 지나고도 낮동안 무더위가 기승인 지금, 대책 없이 집을 1박 2일이나 비워, 가뜩이나 어려워지던 스킬 사용 타이밍 마저 맞추지 못했다. 집을 비울 때를 대비해 사둔 C급 아이템이 있지만 (물병에 꽂아서 물이 똑똑 떨어지도록 하는 얄딱꾸리한 아이템이다.) 써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게 큰 패착이었다. 원래 관리를 못 하는 절화는 진작에 시들어버렸고, 줄기가 썩기라도 했는지 물도 기분 나쁜 누런 색으로 변해버렸다.


다행히 때를 놓치지는 않고 돌아온 덕에 초록군단의 전멸만은 막았다. 

심지어 부흥마저 꾀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바가지 냉수마찰을 한 지 한 시간 만에 우리 집 초록대원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비록 이파리가 누렇게 뜬 모양새지만.




하마터면 줄초상을 치를뻔했던 자, A급 농부로 거듭나기 위해 이제 단단히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화분 관리의 비결이라곤 제 때 물을 잘 주는 것뿐이지 않은가. 농사일에서 최상급 포션에 비견 가는 비료나 농약은 쓸 줄 모르는 것도 반성해 본다. (커피 찌꺼기나 린클 미생물을 시도해 본 적은 있으나, 찌꺼기는 곰팡이가 피어 버렸고 린클 미생물도 마찬가지였다.) 분갈이 시점은 늘 잘 몰라서 화분에서 식물을 뽑아내보면 화분 안에 잔뿌리가 가득 차있고, 눈물 나게 잘 키웠다 싶던 밀싹 화분을 말려버리는 솎아내기 스킬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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