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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Aug 21. 2024

카페에 매일 5만 원 상납하던 나, 100일간 끊었더니

볶은 콩물, 직접 내려봤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회사에서 인기인이다. 모두가 출근하면 나와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와 커피 마시는 건 쉽지 않다. 이미 누가 불러서 나가 있기 때문이지. 내가 카페에서 돌아오면 자리에 앉자마자 냉큼 다시 집어가는 쟁탈전도 있을 정도다. (사무실 내에는 서로를 피하는 미묘한 분위기가 있다.) 이 정도면 카페에 내 사무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오전에만 카페를 여러 번씩 들락거린다. (아, 부장이 이 글을 보면 안 되는데.)  


그러다 보니 내 돈과 남의 돈을 합해 하루에 카페에 지출한 돈만 5만 원이 넘기 일쑤였다. 나만 내는 게 아니니 망정이지, 온 살림을 카페에 고스란히 가져다 바칠 뻔했다 말이다.


거진 100일, 나는 카페를 끊었다. 물론 거창하게 '끊었다'는 능동적인 말은 어울리지는 않는다. 카페인에 취약한 주제에 커피도 끊지 않았으니 돈 아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맛없는 싼 커피에 더 이상 내 입맛을 길들이고 싶지 않다는 결심으로 커피를 직접 갈아 내리기 시작했다. 왜, 아침마다 커피 향기가 나는 집 그런 고오급진 이미지도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말이다.


핸드밀은 포기했다. 한 시간 걸려 반 줌 안 되는 원두가 갈려 나오는 걸 보고, 하루 만에 내 주제를 깨달았다.


대신 간혹 마늘 갈 때에나 쓰오래된 믹서기를 내어놓았다. 커피 애호가들이 알면 극대노할 일이다. 이 믹서기는 대학생 부모님이 마련해 준 것이니, 아주 오래된 물건이다. 요새 나오는 것처럼 모터가 좋지는 못하다. 그래서인지 딱딱한 음식은 두당탕탕하면서 거칠게 갈아놓는다. 그런데 이 모터가 원두를 갈기에는 최적이다. 원두를 두세 줌 쥐어 넣고 전원을 켜자면 투명한 통 안에서 원두더미가 일제히 가운데를 제외하고 겉면으로 몸을 붙인다. 무딘 칼날에는 닿는 일을 발끝으로 막아보듯이. 그러다 맨 위로 제 몸이 밀리면 힘없이 가운데로 굴러 떨어져 제 몸을 분쇄하고 만다. 거칠게 갈린 원두는 또다시 통 겉면을 타고 오르고, 그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며 2mm 정도의 크기로 작아지는 것이다. 이런 데에 미묘한 쾌감이 있다. 


맞다. 맥주를 사고 사은품으로 딸려온 유리잔이다. 얼음 동동 띄운 아아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이렇게 잘 갈아놓은 원두는 바로 먹는 게 제맛이다. 우리 집 커피스푼으로 한 스푼 반. 뜨거운 물을 보글보글 끓여 스텐 컵에 옮겨 따르고 길쭉한 주둥이를 통해 물을 쫄쫄 따른다. 분쇄된 커피가 봉긋 부풀어 오른다. 모습이 정말 기특하다. 그 위에 또 물을 따른다. 커피가 숨을 푸르르 푸르르 내쉰다. 그러면 내 심장도 푸르르 푸르르 숨을 내쉬는 것 같다.


이렇게 '나'를 만날 기회가 내 삶에 주어졌던가 말이다. 


생각해 보면 카페에서 보낸 시간은 온통 밖을 보고 있었다. 크게 적힌 메뉴판을 바라보며 25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까, 아니면 7천 원짜리 드립커피를 마실까 정도의 얕은 고민만 했을 뿐이다. (대부분 경제적인 선택을 했다.) 좋은 일로 찾아온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악다구니를 쓰기 위해 찾아온 취재원도 가리지 않고 만나다 보면 사색은커녕 대화가 막장으로 치닫지는 않는 데에 감사했다. '다음에는 좋은 일로 보자'는 어색한 인사까지 하는 사이만 하나 더 추가하는 바쁘고 민망스러운 일상 속에 내가 어떤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마시는 좋아하는지 기회는 없었다 말이다.


거창하게 '카페를 안 가야 해' 했던 게 아니므로 100일이나 된 줄도 몰랐다. 세어보니 그쯤 된 것이다. 물론 공부를 한 것은 아니므로 원산지를 따지거나 하는 거창한 수준은 도달하지 못했다. 내놓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래도 나는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고, 탄 맛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취향 정도는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예민한 취향이다. 이런 걸 또 맞춰주고 살다 보면 내 행복의 총량이 아주 조금은 늘어나지 않을까. 


매일 마시는 이 볶은 콩물, 어떤 콩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아무거나 마시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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