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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 Aug 18. 2024

퇴사의 추억 : 밥은...먹고 다니냐? (1)

"저희 퇴근 언제 할 수 있어요?

퇴근 시간이 훌쩍 넘긴 시간임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들 자기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속삭이듯이 옆자리에 앉은 사수에게 물었다. 나이대가 비슷한데 텃세도 없이 털털하게 일을 잘 알려주는 사수는 미스터리와 같은 이 회사의 유일한 실마리였다. 


"이사님이 돌아오시면... 그 때 갈 수 있어요."

이사님은 외근이 잦은 분이셨다. 일주일에 2-3번 외근을 나가시곤 했는데, 외근이 끝나면 바로 자택으로 귀가 하지 않고 회사로  돌아오셨다. 그렇다. 우리의 퇴근시간은 고용계약서에 약속된 시간이 아니라, 이사님이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시는 그 시점이었다.


8시쯤이 되었을 때 장마비를 맞고 이사님이 돌아오셨다. 이사님이 이렇게 간절히 보고 싶었을 줄이야. 나는 업무 보고를 마치고 밝게 웃으며 퇴근을 했다. 바깥은 깜깜한 밤이었고, 어느 해나 그렇듯이 몇 년만의 폭우로 내 험난한 퇴근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축축해진 오피스룩을 벗으며 생각했다.


'퇴사... 해야 하나?'

대학 졸업 후 첫 입사한 곳은 작은 디자인 회사였다. 비록 디자인 전공은 아니었지만, 매일 8시간 이상의 직업 훈련 끝에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입사한 첫 회사. 내 열정은 입사 3개월 만에 까맣게 죽어 버렸다. RIP.  수습기 3개월 동안의 내 월급은 80%만 지급되어, 100만원 남짓이었지만, 이 기간이 지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어디 한 번 희망을 키워볼테면 키워보라는 듯이 첫 회사의 수직적인 문화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주말, 디자인 실사 출력에 문제가 생겨 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이미 부장님과 사수이신 대리님은 먼저 나와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아직 신입이었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보태듯이 자잘한 일을 도맡아 했다. 사장님과 부장님은 업체와 미팅을 위해 자리를 비우고, 이윽고 점심시간 사수와 나만 점심을 먹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최근의 내 고민을 사수에게 털어놓았다. 이제 두달 다닌 수습 주제에 '퇴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이 안 좋게 보일까봐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사수는 마치 성장 만화에 나오는 조력자처럼 진심을 다해 이렇게 말했다.


"올리씨, 그만 둘 거면 지금 그만 둬야 해요. 시간이 더 지나면 아까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사실 자신도 고민 중이라는 말과 함께. 사수의 진심 어린 조언에 힘을 얻은 나는 주말 잔업을 끝내고 집이 앙니라 카페를 찾아갔다. 전형적인 갈등 회피형인 내가 또다시 갈등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카페에 앉아 나는 빈 공책을 펼치고 내가 왜 퇴사를 하고 싶은지, 그리고 이번 회사를 결정했을 때 나의 실패 요인은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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