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연 Oct 09. 2023

위기의 19년 차, 어느 하루

2. 위기의 19년 차, 어느 하루

 우선 지난 꼭지에 '황소처럼 묵묵히'와 '호연지기'를 앞세우며 직장생활 잘난 척, 쉬운 척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이글을 시작한다.


 앞서 말한 용기와 비장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인력은 부족한데 연차를 말해야 한다든가, 항공권을 예매했는데 연차가 허락되지 않는 순간이다. '눈치를 살핀다.' 정도로 끝낼 수 없는, 내겐 너무 절박한 상황들이다. 불과 어제 내게 이 두 가지 상황이 모두 일어났다.     

 

 작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막내급 간호사 3명이 동시에 사직했다. 다음날 인력이 한 명 채워졌고 어제 한 명이 더 채워졌다. 아직 한 명이 부족한 상황인데 2월 중으로 채워줄 것이라 했다. 수술실 운영이 쉽진 않을 것이란 얘기다.     

 

 올해 2월 대학 동창, 넷 집이 함께 베트남으로 여행을 계획했다. 모두 맞벌이여서 아이 돌봄이나 부모님 기회가 여의찮은 날로 날짜들을 모아 휴가를 내기로 하고 여행을 예약했다.


 우리 부서는 30명이 넘게 일하는 곳이라 연차에 대한 몇 개의 규정이 있다. 그중에 휴가 격으로 5일을 연속해서 연차를 쓸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위해 5일 중 하루 규정을 어겼다. 여기서 그 규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글은 '허락해 줄 수 없다.'라는 말을 들은 후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며 우울과 분노를 오가는 지극히 주관적인 나에 관한 이야기다.     

 

 과장님은 개인의 안위보다 조직의 안정을 위에 두신 분이다. 어렸을 땐 그분의 모든 것이 내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존경하고 인정한다. 나는 조직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나 자신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그렇다고 조직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수술실은 매우 소중하다. 가족이 내 최고의 가치라면 수술실은 곧 나다. 나의 젊음이자, 가족을 떠나 독립된 나만의 역사이다. 명예롭고 아름답게 지키고픈 나의 커리어이다.     

 

 과장님과 견해차가 있을 뿐 수술실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은 나도 못지않음을 미리 밝혀둔다.     

 과장님은 안정성을 추구하고 그 벽은 견고하다. 그 벽 안에서 자유롭게 연차를 쓰는 건 언제든 오케이다. 하지만 사직, 임신, 출산, 휴직이 빈번한 직장에서 'OK'가 가능한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연차가 허락된 날조차 예기치 못한 병가로 반려되는 일도 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니만큼 안정적으로 인력을 꾸리고픈 과장님의 상황을 이해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도 동의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너무 높다. 굳이 그렇게 까지 않아도 잘 돌아갈 텐데 너무 높은 기준으로 자유를 침해받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자유보다 과장님의 욕심이 앞선다는 생각이다. 과장님에게 규정에 어긋나는 연차가 필요한 순간들이 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철옹성 같은 연차의 벽 앞에 '어떻게 말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수없이 한다. 수술할 때 보다 더 떨린다.     

 

 그래서 연차를 말할 때 필요한 것이 '용기'와'비장함'이다. 비장한 각오로 용기를 내야 한다. 대체로 창칼을 들고 “와~” 하고 달려들었다가 대포 한 방 맞고 펑 나가떨어지는 격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슬픔과 분노로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과장님은 실낱같은 희망의 말 하나를 던지신다.

"그날 수술 일정표 보고 줄게. 전날 일정표 보고 다시 얘기하자.“     


학부모란에 참석 여부 결정해줘야 하는데.

                                   병원 검진 날짜 잡아야 하는데.

                                   항공권 예약해야 하는데.

                                   숙소 잡아야 하는데

                                   친구들한테 대답해줘야 하는데.


 수많은 '하는데'가 있는데 전날 계획 보고 결정해야 한다. 나처럼 덜컥 예약부터 해놓고 떨고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결정하지 못해 떨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우리는 수술 일정이 나오는 그 전날까지 떤다.     

 10년 만에 해외여행이다. 결혼하고 바로 임신, 출산, 육아, 복직, 그리고 코로나 3년 정신없이 보낸 세월이었다. 직장생활 19년 차라지만 또 모든 게 처음인 날들이었다. 결혼 이후 첫 해외여행! 규정을 어겼다지만 떠나고픈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다.     


 포털에 '연차 거부'를 검색해 보았다. 19년을 함께한 과장님에 대한 겁박이 아니라 정말 궁금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연차를 거부할 수 없다. 다만 사업장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 사업주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고 한다.     

 '막대한 지장은 분명 아니지만 나 하나로 시작해 피라미드처럼 29명 남은 사람들이 다 나와 같이 원하면 우르르 넘어질 수 있다. 결국 막대한 지장을 줄 수 있다.'가 과장님 의견이다.     

 

 어쩜 우린 서로의 고구마 일 수 있겠다. 과장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고구마가 쌓여간다. 수긍하지 못하고 계속 화나 있는 나를 보는 과장님의 마음에도 고구마가 쌓여가겠지. 견해차는 이해하지만, 서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결국은 규정대로 그날 일정표 봐서 결정하기로 한 나의 휴가를 앞두고 처음으로 '무단결근'을 생각했다. 그날의 일정표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댈 바엔 차라리 스스로 삐뚤어지는 게 분명하고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2세 19년 차 직장여성이 휘청일 만큼 날 것의 반항심이 팔딱팔딱 뛰었다.     

 퇴근 후 여권을 찾으러 왔다. 만료일이 한참 지나 파란색 신여권으로 신청할 때의 설렘은 다 사라지고 분노만 가득한 내가 너무 서글프다. 여권 민원실 안에 사람들이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빼곡하다. 다들 자유로운 날개를 단 것 같은데 나만 날개도 없이 날고 싶어 하는 사람 같다.     

 

온종일 버거운 반항하는 미꾸라지 하나를 데리고 있느라 밥을 못 먹었더니 너무 배가 고프다. 이런 날은 몸에 좋은 것보다 몸에 해로운 것을 하고 싶다. 편의점에 가 육개장 사발면과 삼각김밥을 꺼냈는데 나이 지긋하신 사장님 내외분이 컵라면 보온기가 고장이 났단다. 

'내 표정이 너무 절망적이었나?'

“배가 많이 고프신가 봐요?”하면서 사장님께서 손수 빨강 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에 담아주셨다. 너무 감사히 잘 먹고 따뜻한 캔 커피 하나 더 계산하려는데 

“젊은 사람이 이 시간까지 왜 밥도 못 먹었어요?”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네셨다.     

 

 뭐가 이렇게 생생할까? 과장님을 이해하는 마음도, 과장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꼭 떠나고픈 마음도, 꿈틀거리는 반항심도, 그리고 사장님의 따뜻한 한마디도. 다 뭐가 이렇게 생생할까?! 어느 것 하나 덜 아프고 덜 미운 게 없이 다 나를 관통하는 걸까?! 겨울의 어둠 속에서 캔 커피 하나 마시며 데리러 오겠다는 남편을 기다리는데 나를 비추는 남편의 자동차 라이트가 너무 반가워,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꿈꾸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 꼭지만의 위기의 직장생활이 드러났다. 19년을 일하고 있는데 참 변덕스러운 직장생활이다.



--성공적인 휴가-

 

 결국 휴가를 떠났다. ‘비뚤어지자! 엇나가자!’ 했던 다짐들이 무색하게 수술 스케쥴이 별로 없었다. ‘아무나 막 사는거 아니라고, 아무나 비뚤어지는거 아니라고, 역시 하늘이 나를 굽어 살피는구나,’ 안도했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연차를 허락해준 과장님이 그저 고마웠다. 

 사는게 참 벨도 없이 행복했다.



이전 02화 '황소처럼 묵묵히'와 호연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