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의 여섯째
아침에 일어나기가 끔찍해. 사라지고 싶어. 또 완전히 구겨졌어. 지구의 종말 온다는 말 없어요? 도망가긴 쪽팔리고. 다 같이 망해야 하는데. 남산은 왜 화산이 아닐까? 폭발하면 좋을 텐데
(‘나의 아저씨’극 중 유라 대사)
일 년 중 3분의 2의 시간 동안 신규간호사가 수술에 실제 참여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수술에 관련된 교육 자료부터, 준비, 실제 술기들 모두 다 가르쳐준다. 이 일은 메인 수술 +@ 개념인데, 매달 누군가 나가고 매달 누군가 들어오다 보니 새로운 후배를 교육하는 게 메인이 되었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 앞에서 신규간호사의 크고 작은 실수 모두 책임지고 교육하려니 일은 물론이고, 스치는 공기에도 예민해진다.
나는 나의 오감 2%를 활용해 수술에 참여하는 의사들의 얼굴색을 탐색하며 그날의 컨디션을 가늠하고, 수술 기계 소리음에 미세한 이상 신호를 감지, 대처하며 공기를 가로지르는 그 날의 긴장감을 측정한다. 그리고 남은 98%의 오감을 끌어모아 신규간호사의 수술 상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제아무리 훌륭한 의사가 있다고 해도 수술은 '합'이 좋아야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렇게 '짝'쳐줄 남은 손바닥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수술 준비'이다. 이것은 이번 생도 처음이고, 직장도 처음이고, 수술실도 처음인 갓 난 아이를 데리고 보통 사람들보다 좀 많이 배우고, 보통 사람들보다는 대부분 예민한 외과 의사들과 합을 맞추어 아픈 사람을 대할 때의 첫 번째 단계이다. 갓난아이 손에 밥숟가락 대신 창과 칼을 쥐여줄 수밖에 없는 비장함으로 이 일을 시작한다.
수술하는 사람 눈치, 후배 눈치, 이일 저일 챙기고 실수하고 뒷수습하고, 교육이라 말하고 잔소리로 읽히는 과정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하고 나면 어느새 그 갓난아이는 엄마 아빠를 말하고 걸음마를 떼는 아이로 훌쩍 자라 있다.
작년에 여섯째를 키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여섯째는 다른 다섯 아이보다 배우는 게 더뎠다. 좀 답답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실수가 잦았다. 화가 났다.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자꾸 큰 한숨을 쉬어대며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후배의 얼굴은 점점 지쳐갔고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이건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일이 끝나고 후배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매운 낙지를 포장해 그날의 저녁 식탁에 올려놓고 남편과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오늘의 나를 고해성사했다.
‘또 완전히 구겨졌어.’
라 말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유라’와 후배의 얼굴이 자꾸 겹쳤다.
'나처럼 나이 든 여자는, 오늘 구겨져도 내일이면 쫙 펴져 낄낄대고 질긴 생을 억척스럽게 살겠지만. 후배처럼 어린 여자는, 오늘 구겨지고 그렇게 구겨진 채로 떨고 쫄고.'
남편에게 나 스스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참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저녁을 정리하고 남편은 10이 넘는 덧셈이 어렵다며 징징거리는 아이의 숙제를 봐주고 나는 그 뒤에서 아이의 교복 와이셔츠를 다림질했다. 와이셔츠에다 대고 물어봤다.
'피곤하고 힘들고 짜증스러운 내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게 뭘까? 생이 원래 고통인데 고통스럽다고 아무렇게나 내뱉고 살면 넌 행복하니?’ 아니다. 절대.
요즘 계속 못난이 삼형제 인형의 얼굴을 하고 문제집과 씨름하던 딸이 어느새 거리의 바람 인형처럼 쫙 펴져 신바람이 나게 문제를 풀어댔다. 인내심을 갖고 딸을 이해시키려던 아빠의 긴 가르침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었다.
'인생은 원래 고통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라는 진실을 감히 내가 인내심 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스스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뭘 더 가르친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남의 소중한 딸에게 상처나 주고. 참으로 나는 부족한 인간이다.' 자괴감이 들었다.
다음날도 여섯째는 많은 걸 힘들어했다. 나는 전날 자신을 많이 미워한 덕분에 쓸데없이 한숨을 남발하거나 곱지 않은 눈으로 여섯째를 흘겨보지 않을 수 있었다. 힘든데 힘든 걸 계속하는 여섯째가 그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여섯째를 데리고 어떻게든 끌고 가는 게 최선일까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보았다.
생각 정리 후 말을 잘하고 나보다 조금은 편하게 느껴질 법한 다른 후배를 시켜 여섯째에게 조심히 물어보라 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후배가 'yes'를 한다면 이참에 나도 신규간호사 교육을 잠깐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지금 이 과가 너무 힘들면 잠시 여기를 쉬고 다른 과 훈련을 받는 건 어때? 아님 밖에서 수술하는걸 좀 더 보는 건 어떨까? 혹시 더디 갈까 불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거 아는데. 힘든 걸 뚫고 나갈 때 성장하기도 하지만, 힘들 때 돌아가면 또 돌아간 대로 성장하기도 해. 그냥 너에게 맞게 너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면 돼."
여섯째는 '뚫고 나가고 싶다' 했다.
'나는 이제 빼박이다.'라며 하면서도 구겨지지 않고 '뚫고 나가고 싶다.'라는 여섯째가 고맙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하고 그랬다.
‘내가 가루가 될지라도 나를 갈아 다시 이 아이를 잘 키우자’
감사하며 다짐했다.
지금 그 여섯째는 벌써 우리 과를 졸업하고 다른 과 교육을 받고 있다. 여전히 더디고 실수가 많지만 매일 출근하는 여섯째가 너무 기특하고 대견스럽다. 요즘 MZ들은 일은 일일 뿐, 쿨하다는데 우리 후배들은 치열하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일한다.
촌스러워도 너무 촌스럽다.
귀하고 천한 일은 따로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면 그게 귀한 거고, 억지로 대충 한다면 그게 천한 거다. 매일매일 쪼그라들고 구겨지며 귀하게 성장하는 후배들을 따라 나도 배운다.
세상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임이 틀림없다!
최근 그 후배는 두달 전 퇴사했다. 이유인 즉슨 '부모님께서 서른 이전까지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 줄테니 하고싶은걸 해 보라 했다.' 하셨단다. 후배는 좀더 하고싶은 공부를 더 늦기전에 해보고 싶다했다. 열손가락중 새끼손가락 같던 아이가 떠난다하니 눈물이 났다.
'어딜가든 귀하게 대접받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너무너무 고마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