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워킹맘의 낭만에 대하여.
워킹맘 8년 차 다. 글자 그대로 '워킹'과 '맘'이 전부인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내게 8년 된 비밀 하나 털어놓고자 한다.
4시 퇴근, 6시 아이 하원 시간 사이에 이동시간을 제외하고 한 시간 정도 내 시간이 있다. 보통 30분 정도 소파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멍을 때린다. 그런 다음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로봇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준비한다. 그리고 6시 5분 전 아이를 하원 하러 나간다.
퇴근 후에도 테트리스처럼 많은 일들이 쏟아진다. 한 개의 블록이 어긋나면 구멍이 숭숭 난 채로 우르르 쌓여버리는 일이 없도록, 차근차근 밑 작업을 잘해놓아야 한다.
깨끗한 집에서 종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고생했을 아이를 반갑게 맞이하고, 갓 지은 밥과 따끈한 국물이 있는 식탁, 그리고 남편의 퇴근을 반기는 아내와 예쁜 딸. 힘들고 피곤해도 세 식구 식탁에 모여 앉아 다시 웃는 시간. 나는 이 일상을 사랑한다.저녁 먹은 뒤로도 또 몇 개의 테트리스 블록이 쏟아지지만 탄탄하게 다져놓은 땅 위로 남은 블록마저 제때 잘 끼워 보내며 보내는 안전한 하루에 감사한다.
어느 날엔가 남편이 '넌 도대체 언제 쉬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 해 주었다.
"잘 때 쉬지."
여기까지만 보면 영락없는 현모양처 같지만 사실 난 아저씨처럼 노는 걸 좋아한다. 평균 내 보자면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남편 몰래 아저씨들처럼 거하게 마시고 빨리 취하고 툴툴 털고 일어나는 술자리를 가진다. 좋아하는 선후배들과 좋아하는 밥집에서 좋아하는 소주를 마신다. 밥 한 공기를 순댓국에 훌훌 말아 한 술 크게 먹은 뒤, 잔이 찰랑이게 가득 부어진 소주를 한입에 털어 마시는 맛이 기가 막히다. 돼지고기 육수의 진한 짠내가 남아있는 입안 가득 달고 쓴 소주를 삼키면 금세 속이 시원하고 뜨겁고 그게 아주 맛있다. 문학보다 센 맛이라 다 형용할 수 없다.
이런 날은 시간이 곧 금이라 그 시간을 최대한 쓰기 위해 미리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자리를 부탁드리고 메뉴를 말씀드린다.
내가 술자리를 갖는 이유는 그냥 좋아하는 선후배들과 그냥 한잔하고 싶어서이다. 날씨가 좋아서, 비가 와서 등의 날씨 탓에서 시작해 기분이 울적해서 좋아서 등의 기분 탓을 하는 건 그냥 다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술 취한 내가 하는 말의 99퍼센트는 다 쓸데없는 소리인데 '하하 호호'즐겁게 받아쳐 주는 나의 오래된 소중한 동료들. 흉허물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랑해주고 이해해주는 고마운 동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안받는 마음 때문일 거다.
어디를 가나 나의 역할이 있다. 집, 직장, 시댁, 친정 등 어딜 가나 난 꽤 쓸모가 있고 비중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난 그 역할에 꽤 열정적이다. 아무도 내게 그런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들이다. 나로 인해 내 곁의 사람들이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평가한다.
나도 나 자신을 평가하는데, 나의 오래된 소중한 동료들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아저씨처럼 빨리 마시고 30분 만에 만취해 풀린 눈으로 아무 말이나 떠드는 그런 나를 ‘그러려니’이해해준다. 이게 좋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선배나 후배들에게 '술 한잔하자'고 졸라대나 보다.
올곧은 조언이나, 따뜻한 위로의 말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내 앞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짠’을 해주는 그들이 참 고맙다. 그 시간 동안 그들이 기쁘면 나는 더 기쁘고 그들이 슬프면 나도 함께 무너져 내린다.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애쓰고 긴장하는 나에게 한없이 낭만적인 시간이다.
티브이 속에는 '나의 아저씨가'가 있고 여기 둔촌동 오후 네 시, 어느 순댓국 밥집에 현실판 '나의 아줌마'가 있다.
이런 날은 다른 방법으로 저녁 시간 테트리스를 맞춘다. 집에 가는 길엔 택시를 이용한다. 한 도시를 빙 둘러서 가는 버스보다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택시를 타면 30분 정도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저녁 식사는 택시 안에서 배달 앱으로 준비한다.
선후배들과 한 잔 더 하며 술자리를 계속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이 정도면 족하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잘 정리하고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고 껌 한 통을 다 씹어가며 필사적으로 술을 깨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택시에서 잠깐 졸기도 하고 잠깐 울기도 한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울컥울컥한다. 선지처럼 덩어리진 슬픔을 건져내듯 그렇게 눈물이 난다. 그 눈물이 내 것일 때도 있고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군 동료의 것일 때도 있다.
'어쩜 사는데 더 드라마 같아,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나보다.‘
정신이 완벽히 돌아오진 않지만, 여느 날과 다름없이 6시 하원 하는 아이를 반갑게 맞이하고, 배달 온 저녁 식사를 식탁에 그럴 듯하게 올리고, 남편의 늦은 퇴근을 반긴다. 군데군데 어쩔 수 없이 틈을 남긴다. 그러나 테트리스 블록들이 미친 듯이 쌓이는 일이 없도록 취한 나를 채찍질해가며 필사의 노력을 해댄다. 남편은 나의 비밀을 눈치채고도 남을법한데 이에 대해 한 번도 묻지를 않는다. 다만 그런 날은 아이를 스스로 더 세심히 봐줄 뿐이다.
그러면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긴 시간 씻는다. 유튜브' 철학 토크'를 들으며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반성한다. 크게 잘못한 건 없지만 양심에 비추어 남아있는 조금의 부끄러움에 대해 반성한다.
‘술을 마시자 말자는 것이 아니라 다음부턴 한 병 정도만 마셔야겠어.’
‘앞으론 5분 더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야겠어. 하마터면 조금 늦을 뻔했잖아.’
‘숙취 해소제는 술 마시기 전에 마셔야지. 아니면 술 마시기 전에 우유를 꼭 한잔 마시자.’
옛 성인들의 좋은 말씀, 반성, 따뜻한 물의 온도, 긴 시간 목욕은 모든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욕조 하수구 속으로 마지막 물까지 쪼르르 빠져나가면 모든 것이 개운해진다. 다시 무던하게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살 터이다.
‘이거라도 하고 살아야지.’하며 뻔뻔스럽게 큰소리치고 싶지 않다. ‘직장’과 ‘맘’이 전부인 내게도 이런 ‘낭만’하나쯤 비밀스럽게 품고 살고 싶은 마음이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가정에서 사랑받는 것과는 별개의 정서이다.
끝으로 언제나 맛있는 순대국밥과 소주 한 잔의 힐링을 주시는 순댓국 밥집 사장님 내외분, 누구 하나 살가운 이 없지만 속정 깊은 나의 동료들, 나의 비밀을 끝까지 모른 척해주는 남편, 엄마에게 지독한 냄새가 난다면서도 꼭 안아주는 우리 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세 번째 꼭지를 마무리한다.
-회식 후 택시 같이 기다려주는 동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