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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Oct 18. 2023

불혹의 성장통 2

2. 불혹의 성장통 2

#2021년 10월23일     

 대나무 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복두장의 마음으로 오늘의 일기를 쓰고자 한다.

 요즘의 나는 나쁜 일 투성이다. 2021년 부정적인 말은 거의 내게 금기어였다. 좋은 말은 좋은 일을 끌어 당기고 나쁜 말은 나쁜

일을 끌어당긴다길래,

좋은 말만 하고 나쁜 생각은 꽁꽁 가둬뒀더니, 어느새 당나귀 귀만큼 자라 머리 속을 뚫고 나간다


지금부터 좀 힘든 일을 열거한다.

 1. 약속을 지키지 않아 친구와 이웃에게 신뢰를 일을까 두렵다.

 2. 두번째 시행한 아이 성장검사에서 성조숙증을 진단받았다.

 3. 스마트 스토어는 진짜 포기하고 싶다.

 4. 내가 진짜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

 5. 잘해 왔다고 믿었던 모든 게 틀린 것 같다.

 6. 까 보니 아무것도 없다.

 7. 무언가를 할 생각도, 하고 싶던 일도 모르고 집과 직장에만      메달릴 때가 속 편했다.

 8. 과거로 돌아가면, 미래가 없다.     

 개미처럼 열심히 살았는데, 수확한 게 하나도 없는 베짱이가 된 것 같다. 요즘은 마음조차 가난하다. 가난한 시인의 마음으로 삶을 아름답게 노래하면 좋으련만, 너무 자본주의 인간이 되어 시마저도 멀어졌다. 사랑하는 건 멀어지고 두려움만 곁에 있다.

 커밍아웃하고 당나귀 귀 임금님은 자유를 얻었는데 나는 무얼 얻으려나... ... 유리멘탈은 남 얘기인줄 알았는데 깨질 것 같다.

 이걸 다 견뎌낼 강한 멘탈 얻고 싶다.  

                  

#2021년 10월29일

 참 아끼고 아낀 휴가다. 생각해보면 난 아낀 게 참 많다.

퍼주는 걸 좋아하는 본성을 거르고 아끼느라 제일 버둥대는 게 '시간'이다.

내 시간을 만들려고 새벽 기상을 시작한 지 303일째다. '좋아하는 시간엔 지연이 너 좋아하는 것만 하라'던 남편의 따뜻한 조언을 거르고

 '세상에 뒤쳐지지말라!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워야 한다.'는 유명인들의 조언을 따른 결과 나는 '번아웃'이 되었다.     

 처음엔 재능이 없어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잘 안되는 모든 이유가 '노력'이 부족한 '내 탓'이라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끼고, 밤 열한시에 시작하는 줌 클래스를 최근 시작했다. 평소 닮고 싶은 분의 강의였다. 열시전에 아이를 재우고, 그사이 잠들까 봐 알람까지 맞춰놓고 들었다.

 강의 중, 인스타에 하루 여덟 시간 이상씩 쏟아부어야하는 말씀을 듣고 간절한 마음에 여쭤봤다.

 "그게 직장 다니면서, 육아하면서도 가능할까요?"

 "애이~ 욕심쟁이시구나~"

 머리가 띵~

 "그래도 뭐~ 하기 나름이죠."

 강사님은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시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무리 지으셨다.     

 지독한 감기에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아가며 시작한 강의였다. 다음날 감기 걸린 나를 위해 약 먹고 푹 잤다. 이렇게 강의를 삼일째 거르고, 감기는 다 나았다.

 '그래. 나는 재능도 부족하고, 노력도 부족했지만 제일 부족한 건 '시간'이었어. 그래서 어려웠던거야.'

 대부분 문제의 원인이 내 내부보다는 나도 어쩔 수 없는 '시간'을 탓하니 맘이 편안해졌다.     

 굉장히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쓰고 있다 할지라도 내 맘이 편하다.

너무 돈돈 하지말고 좋아하는 시간에 좋아하는 걸 하며 좀 더 그냥 속 편한 행복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나는. 머리비상한 사람 아니고 디지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그냥 퍼주는 거 좋아하는, 따뜻하고 진실된 모습의 생긴 데로 살자.     

 유명인들의 말에 조바심은 개나 주고, 들판에 소나 기르는 마음으로 좀 더 느긋하게 내 시간을 즐겨줬음 좋겠다.

 내가 나에게 그러기를 부탁한다.

 휴가는 그렇게 보내자.    

                

#2021년 10월30

 어쩌다보니 부모님이 우리를 끌고 여행해 주신다. 운전도 해주시고 밥값도 계산해 주시고 길눈 어두운 아들 내외를 위해 길 다 찿아주시고......

우린 그냥 배부르고 등 따시게 부모님만 따라다니는, 

우리 딸 또래의 아이가 된 것 같다.

 모든 게 안전하고 편안하고 좋다. 

    

#2021년 10월31

 경주는 다 좋다. 도시를 집어 삼킬 것 같은 높은 건물이 없다. 낮고 또 낮은 기와 지붕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것만 바라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딸도 신이 나는지 하루 종일 입이 쉬지 않는다. 워터파크에서 규칙도 너무 잘 지키고 잘 깜빡하고 잘 흘리는 엄마도 잘 챙긴다.

 네 시간 넘게 놀고, 온천수에 목욕하고 숙소로 돌아와 티비를 보는데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나른해진 몸에 겨운 졸음이 몰려오고

어느새 그르렁그르렁 코를 골며 남편이 낮잠 잔다. 좀 새근새근 자주면 좋으련만~

이 감성파괴자!!!  

        

#2021년 11월1일

 경주월드. 놀이기구 잼. 열개넘게탔다

 이렇게 경주월드를 끝으로 경주를 떠난다.

 나는 영화 '경주'를 좋아했다. 영화 '경주'는 무언가를 굉장히 말하고 싶은데, 감독조차도 ' 내가 하고 싶던말이 뭐였지?'하며 얘기들이 어디론가 표류하는 기분이 드는 이상한 영화였다.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이 난다해도 쉽게 이어지지 않는 스토리였던 것 같다. 기괴한데 끌리고, 웃낀데 어쩐지 짠했다. 근데 그게 너무나도 내 취향이였다.

'뻔할봐에야 복잡해지겠어.'뭐 그때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기억속에 이렇게 남겨져 있는 곳을 마흔이 다 되어 찿아보았다.기와를 얹은 단층의 낮은 단아한 건물들 앞에 용적율, 건폐율이란 단어가 굉장히 상스럽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잘 다듬고 가꾸어진 아름다움이 아니라, 태초에 격을 지니고 태어난 고귀한 품격이 느껴지는 도시다. 경주가 너무 아름다워, 영화처럼 기괴한 이야기가 실제로 존재 할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집에가서 휴가기간동안 영화'경주'를 다시 봐야겠다.

 '좋아하는 시간엔 좋아하는 것 만 해야지.'

 사진첩을보니 나는 이쁜게 하나 없는데 사랑하는 가족들과 나눈 시간은 모두 다 예쁘다.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2021년 11월2일 오전

 집에 돌아왔다. 어디서부터 손을대야 할 지 모르겠는 어지러운 집안 곳곳을 그냥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고 생라면 하나 뜯어 드라마 '인간실격'을 보기로 했다.     

 깔끔쟁이는 아니어도 설겆이 쌓이는거 못 보고 방바닥에 물건 늘어져 있는 거는 못 보는데 그냥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처럼 드라마에 집중한다.     

 예쁜 딸 씻기고 딸 아침 식사만 깨끗하게 챙겨 먹이고 등원시키고 난 후, 혀에 감기는 맵고 짭쪼름한 생라면 한 봉지를 끌어안고 가슴에 감기는 배우들의 뻐근한 대사들을 꿀꺽 삼킨다.

더러운 우리 집 쇼파 위 진짜 '인간실격'이 티비에 빠져있다.


#2021년 11월2일 오후

 낮동안의 어지러운 집을 빠르게 정리하고 남편과 아이 하원시간 맞춰 밖을 나섰다.

 아이 첫 성장 억제주사를 맞추는 날이다. 다른 것 보다 주사가 아플까 봐 걱정이다.

 아이는 당장 눈 앞의 주사 바늘이 보이기만 해보 겁을 잔뜩 먹고 울었지만, 진짜 맞는 동안은 내내 담담하게 잘 맞았다.     

 겁나는 순간 가족이 모두 함께라, 우리 모두 아프지만 그 순간을 잘 견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배 끊고 살찐 남편을 위한 옷을 사고, 고생한 딸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을 봤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더 끈끈하게 해 지게 하는 걸까?!

딸은 다행히 컨디션이 좋고, 영양만점 매생이굴국은 간이 딱 맞고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하는 저녁 시간이 모두 축복같다.     

 낮에 매를 맞는 기분으로 밖으로 내몰렸는데, 돌아온 집은 너무 따뜻하다.

장 보면서 통조림 옥수수를 사는 남편을 의아하게 바라 봤는데 알고보니 휴가인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거 만들어 주고 싶었다는 남편.     

 저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려 번아웃이 되었다는 며칠 전의 못생긴 투정들이 가을날의 낙엽처럼 지고,나는 천년을 뿌리내린 커다란 나무처럼 남편과 아이를 위해 존재하고 싶어진다. 봄이면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초록잎을 반짝 거리고, 가을엔 곱게 물들고. 겨울엔 희고 아름다운 눈꽃을 피우고만 싶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11월4일

 나는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일이 없으니 아이등원 후, 남편 출근 후, 아이 잠든 후, 남편 잠든 후 드라마만 본다. 컵라면과 생라면, 커피를 잔뜩 쌓아놓고 드라마만 있으면 나는 어디도 나가지 않고 365일을 보낼 수 있다.     

 드라마는 보통의 삶을  상처받은 어느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계속 보다 보니 상처받는 삶이 원래 보통의 삶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저 보통의 고만고만한 시련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소시민이지만, 어쩐지 저들의 슬픔이 내 얘기처럼 이해가 간다.     

 곁에 있었다면, 말 한마다 붙이지 못하는 쫄보지만 티비로는 저들의 슬픔을 마음껏 안아주고 다독여 줄 수 있다. 마치 나를 돌보는 것 처럼.     

 혼자인 시간 마음껏 슬퍼할 수 있어 좋다.

 슬픈 마음도 이렇게 시간을 내야 즐길 수 있는 워킹맘이다.

 슬픔을 일탈처럼 즐기니, 즐거움이 배가 되는 아이러니.

 휴~~~ 드라마가 너무 좋다.    

 

#2021년 11월5일

 금같은 휴가가 다 지나간다.

 항상 아이 봄방학 때 휴가를 가졌는데, 이런 휴가 결혼하고 처음이다.

 두번의 브런치를 가졌다.

 둘 모두, 키가 170이 훌쩍 넘는 세 아이의 엄마다. Ctrl+c, Ctrl+v 같은 느낌이다.

사람을 잘 안 만나고,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는 게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비결인데, 이 둘과는 꼭 시간을 따로 떼어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 근데 세 아이 얘기에 우리 애 얘기까지 하느라 그 말을 못했다. 그래도 브런치를 너무 잘했다. 등원하고, 출근한 후 엉망같은 집을 덮어두고 밖을 나온다는 게 정말 내키지 않아서 연차든, 휴일이든 가족아닌 다른 사람과 브런치 모임을 하지 않는데 , 막상 나오니 예쁜 음식과 수다에 정신이 홀려 생각보다 집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가을날과 말이 통하는 친구, 여유있는 시간. 아~ 브런치는 참 좋은거구나. 돈이 참 좋다. 휴직이 웬말이니.

벌자벌어~!!!     

 아이 입학설명회도 다녀왔다.

 결혼할 때 받은 여전히 새 옷 같은 버버*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었다. 결혼 할 때 받은 예물도 주렁주렁 차고, 결혼할 때 받은 백도 꺼내들고 시내버스를 탔다.     

 코트가 구겨질까 신경 쓰이고 오랜만에 한 악세사리가 근질 거리고 내리는 곳을 놓칠까봐 시내버스 안 방송에 청각을 곤두세우며 그렇게 한시간을 내달렸다. 시골에 있다는 내 편견 탓인지 사립초의 유나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다 따뜻하고 좋아다. 꼭 붙었으면 좋겠다.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니 더이상 코트도 악세사리도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돈이 참 좋구나. 휴직이 웬말이니! 벌자 벌어!     

 미용실에 거의 일년만에 갔다.정확히 말하자면 파마는 이년전에 했고 뿌리 염색을 한지는 십개월이 지났다. 나는 염색을 하고 아이는 단발로 싹뚝 잘랐다.     

 미용실 선생님이 그동안 도대체 왜 안온거냐며 묻는데 제일 만만한 코로나를 탓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용실값을 아끼려거나 하는 의도는 정말 없었다. 그냥 굳이 해야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살았다.     

 아주 고급지게 머리 색깔이 잘 나왔다. 우리 애는 너무 귀여워졌다. 흙속에 파묻혀있던 진주처럼 애미도, 아이도 미모가 빛을 발하는구나!

 휴직이 웬말인가? 벌자 벌어!

 옷정리에 대청소까지... ...이렇게 하다보니 드라마를 아무리 열심히 본다고 보는데. 아직 다 못봤다. 이렇게 휴가가 끝나가고 친정가는 길이다.     

 돈이있어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머리도하고, 아이 학교도 보내고, 드레스도 사입히고 하는구나.     

 잘 쉬고 또 버는 일이 다가오는구나. 얼마나 행운인가. 벌 수 있으니... ...

 충분히 자조적이었고, 여유로웠고, 행복했다.     


#2021년 11월5일

 아침일찍 일이 있어 나가시면서, 엄마는 참 많이도 준비해 놓으셨다. 오랜만에 은색 밥상을 펴 보았다. 사위는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은색 상이다. 가난하고 절절한 사랑의 기억이 가득한 내겐 추억의 밥상이다. 그 상위에 올려진건 왜 다 하나같이 그렇게 맛있던지... ...     

 가계부에 구멍이 나도록, 살림을 쪼개면서도 더운밥 한번 거른적 없는 엄마의 사랑덕에 참 배부르게 자랐다.     

 내가 취직하며 사준 쇼파가 꺼질까 봐 아껴 앉으며 애지중지 하시더니 손주들 탄생과 함께 뜯기고 꺼지고 해 , 이참에 시내 가구점에서 온돌 쇼파를 구입할만큼 부보님은 더이상 가난하지 않은데 나는 가끔 그 시절의 은색 밥상이 그리워지곤 한다.     

 엄마의 삶처럼 깨끗한 흰 천으로 덮인 상 아래 소담스럽게 고구마며 과일, 부침개가 소쿠리 가득 담겨있다.     

 우리 엄마 오랜만에 친정에 오는 큰 딸을 사위를 손녀를 무척이나 기다렸나 보다.

아~ 좋다. 친정 밥도 맛있고 아랫목도 뜨끈뜨끈! 넷플릭스 킹덤 보시겠다고 바꾼 75인치 티비도 다 좋다. 살찌겠다.    

      

#2021년 11월7일

 비바라비다. 인생만세

 프리다칼로가 남긴 이 한마디를 보지 못했다면 끝나가는 휴가앞에 당장 내일의 출근이 두려워 몹시도 심한 우울감에 빠져 있었을 것 같다.     

 팔할이 방황이라고 여겨지던 삶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가끔 방황하고 자주자주 행복해했다. 물론 아주 가끔의 방황이, 행복했던 삶을 부정할만큼 강력하긴 하지만... ...     

 짦은 이 글귀가 더이상의 열정을,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쌓인 일더미 앞에서 하루에 몇번을 죄절하다가도 금새 또 씩씩하게 잘 해내가는 내가 아니던가! 시간이 모자라다 느낄 만큼 매 순간 순간 넌 참 모든 것에 열정적이야!

멕시코에 프리다칼로가 있다면, 한국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워킹맘 이지연'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숲속에서 호젓하게 족욕을 즐기며 짧게나마 읽은 월든의 글귀도 긴 힐링이 되어주었다.     

 용감한 여인과, 영리한 오두막 사나이의 고통과 성찰로 삶을 또 가슴뛰게 바라본다.

좋아하는 시간에 부디 좋아하는 것으로 채우길... ... 진짜 나를 사랑하며 용감하게 내일 출근!!!


 #2021년 11월 12일

 강에 앉은 보름달을 껴아는 맘으로 당신과 딸을 본다.

하루종일 나의 품을 떠나있던 딸을 안아주고,하루종일 나를 떠나있떤 당신의 품에 안겨본다.

 휴가는 끝이나고, 출근한 직장은 한강은 모자라도록 일을 풀어 놓았지만 그 끝에 당신과 딸이 있어 안아도 보고 안겨도 보고 보름달을 한아름 품고 평화롭게 잠들던 한 주.

 김밥을 돌돌 말고, 식탁을 가득 채우는 일은 새롭게 즐겁네.

 버거운 욕심에 마침표를 찍고 마침내로 시작하는 문장을 만들어 보는 한 주 였다. 꿈꾸는만크 이뤄가는 세상이라기에 억지로라도 크게 늘려 본 꿈은 점점 더 나와 멀어져갔다.

 꿈의 크기를 줄이니, 행복이 가까이 와 있다. 이게 언 루저의 자조적인 일기라 할지라도, 나는 이정도가 참 좋다. 치열하게 일하고 돌아온 내가 누려여 할 진실인 것 같다.

 하늘에 뜬 보름달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환희, 그 속에 제일 소중한 가족이 있다.

 좋아하는 시간이 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즐길 나의 일은.

 독서도 아니고 공부도 아니고 그냥 가족과 각자의 방식으로 쉬는 것이다.     


 여전히 내게 40대는 불혹이 아니다. 지금도 난 무언가를 더 이루어 내려던 2021년의 연장선상에 있다.     

 스마트스토어는 하지 않는다. 인스타마켓도 더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호기롭게 새로운 세상에 문을 두드린 그 해, 끝무렵 마침내 얻은 결론은 '그냥 쉬자'였다. 아무나 디지털 노마드로 경제적 자유를 이룰 수 있는게 아니었다. 아무나 이룰 수 있다 할지라도 내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 해 마흔의 성장통을 겪으며 깨달은 이다.          


 하지만 내가 얻은것이 피로함, 디지털 능력 결핍만은 아니었다.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그 해 부터 일기를 썻다. 오래도록 쓰다보니, 쓰는 것 그 자체로 삶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워킹과 맘이 전부였던 내게 자연스러운+@가 생겨났다.          

일기는 아무 결과를 요구하지 않고, 채찍질 하지도 않는 조용한 나의 친구이다. 여전히 불혹아닌 세상을 견디게 해 주는 지혜로운 조언자다.     

2023년엔  이를 붙들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주제에 무슨 책을 쓰나? 이게 무슨 책까지 낼 일인가? 두려웠다.          


 돌아보면 긴 생은 늘 발자국을 떼야만 새로움이 열렸다. 주저하던 첫 발은 늘 그렇게 두렵고 설레이는 것이었다. 새벽기상을 하고 스마트 스토어를 해 보겠다고 무턱대고 시작해본 결과 얻은 '번아웃'이 이렇게 글쓰는 삶으로 이어진것처럼 나는 일단 해 보기로 했다.          


 삶은 매일 일보일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한동안은 후퇴했다가 어느날은 토끼처럼 훌쩍 저만큼 달아나 있다. 무언가를 꿈꾸고 무언가를 하는 삶은 언제나 흐르게 되어있다. 머물러 있기를, 뒷걸음질 치기를 두려워 말고 한발짝 한발짝 걸었더니 제법 묵직한 분량의 글이 쌓였다          


 후회가 없다. 좀 더 잘 쓸걸 하는 아쉬움도 없다.마흔이 된 2021년, 마흔 둘의 2023년. 내년, 또 내후년 나는 무엇을 꿈꾸고 얼마만큼 흘러갔으며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가? 설렌다.          


 냉장고를 오가는 밑반찬 같은 고민말고, 비스포크 가전이나 편집샵에 걸린 디자이너의 옷같은 정체성 있는 고민을 하고, 선택하고, 특유의 매력을 지닌 생기발랄한 여인을 꿈꾼다.          

세상이 참 미치도록 설레이고 재밌다. 이런 세상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바라보는 '불혹'의 마음을 나는 50이 되어서도 얻기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은 내게 '불혹'이 아니라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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