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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이너프 Sep 17. 2024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라캉과 불가능의 역설

대부분의 사람은 늘 무언가를 기대하며 산다.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무언가를 기다리며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다림도 기대감도 모두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내가 기다리는 그것(혹은 그 사람)이 늘 오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그것이 나에게 가장 이상적이고 매혹적인 것일수록) 결코 나에게 도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라캉은 이처럼 절대적 쾌락을 약속하는 것을 주이상스(Jouissance)라고 불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은 어디까지가 것들이고, 어디까지나 오지 않을 것들일까? 누구에게나 가장 깊은 마음 속 욕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그것이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것들은 아니다. 그러니까 경제적인 성공이나 내가 원하는 직업이나 지위를 획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완전하고 이상적인 향락을 약속하는 것들이라기 보다는 그것의 상징화된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상징화는 우리를 실재(real)의 그것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들고, 그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어쨌거나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인 주이상스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산다는 건 엄청난 정신적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대신에 상징화된 다른 가치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막상 내가 그토록 원한다고 믿었던 것들을 얻어도 생각만큼의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가족이나 여러 식구들 중에서 그 구성원들을 힘들게 하고 공동체 전체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며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무언가를 꿈 꾸고 있다. 특히 돈이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돈은 정말 그 사람이 도달해야 할 주이상스가 아니다. 자신의 '진정한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이들의 말 속에는 대개 미래지향적인 언어가 들어 있다. "몇 년만 지나봐라", "5년만 있으면 다 돼". 그러나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그들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또 다시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는 과거를 반복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독특한 시간적 구조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무시간성'이라는 특성이다. 이미 내면 깊이 새겨진 무의식의 흔적은 현실의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변함 없이 그대로이고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면서 늘 과거를 반복하게 만드는 힘이다. 마치 흐르지 않는 매우 강한 중력 속의 시간과 같다.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왜곡되며 매우 더디게 가듯, 누군가에게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으로 계속 회귀하는 성질을 갖는다. 이렇듯 현실의 시계와 내 안의 시계가 많이 다르다면 우리는 오지 않을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왜 어떤 사람은 흐르지 않는 시간의 중력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일까? 그건 개인마다 나름의 이유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게 과거로의 회귀이든 정말 미래를 향한 나아감이든, 실현될 수 있는 꿈이든 그렇지 않든, 나만의 그날을 기다리며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기 때문에(어쩌면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것이란 기약이 매우 적기 때문에) 깊은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버텨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를 세상에 데려온 부모의 욕망 그 자체일 수도 있고, 부모(혹은 타인)로부터 물려 받은 욕망일 수도 있으며, 시간의 중력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채 굳어진 나의 욕망일 수도 있다. 부모의 욕망 그리고 나의 욕망을 깨닫게 된다면 더이상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될 수도 있다. 그건 불가능한 것을 온전히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오지 않을 것을 위해 살기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당장 가능한 것을 실행한다는 의미이다. 그건 기다림이 현재진행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라캉학파 분석가인 장-다비드 나지오는 "욕망은 우리가 말을 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충족되는 일이 결코 없다"고 말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무질서가 아닌 상징적인 질서가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이상적인 모든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멈춘듯 더디게 가는 무의식의 시간이 아닌 현실의 시간 속 나의 욕망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기다림이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인 것은 아닐까? 언젠가 내게 것을 기다리지는 않는 법이다. 기다림을 벗어던지는 것, 그것은 나만의 시간을 되찾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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