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는가? 보통은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하면 외설적이고 성적인 사랑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플라토닉 러브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에로스적 사랑이란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또 플라토닉 러브나 성애적 사랑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사랑의 신과 죽음의 신을 의미하는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 온 용어들로 각각 '삶 충동'과 '죽음 충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에로스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좁은 의미의 성적 사랑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넓은 의미를 담고 있을까? 그건 바로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본질은 흩어져 있던 여러 요소들을 한데 묶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요소들이란 서로 다른 것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이유로 단순한 성애적 사랑(sexual love)은 단순히 플라토닉 러브의 반대가 아니라 무언가가 빠져 있는, 흩어져 버린 사랑의 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니콜라 에이벌 히르슈는 '성과 사랑의 통합'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대방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없는 성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친밀한 성적 관계라 할 수 없다.
즉, 에로스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떠한 한 요소가 결여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타나토스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나토스, 즉 죽음 충동은 무언가를 흩어지게 하는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친밀감이 결여된 성적 관계나 정서적인 요소만 있고 감각적인 접촉이 결여된 관계 모두 무언가가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성과 사랑, 즉 좋은 것만이 포함될까? 아이러니하게도 에로스는 그 반대 속성인 타나토스 또한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는 힘이다. 사랑에는 공격성과 미움도 함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과 성 모두 우리가 잘 의식하진 못 하지만 다소 공격적인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다. 성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공격적인 요소가 내재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랑과 성의 관계가 파괴적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 중심에 에로스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중심을 잡고 있다면 공격성이나 미움 같은 파괴적인 것들도 결국 그 안에서 통합될 수 있다.
이는 정서적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처음에 사랑하는 상대를 이상화한다. 그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고 그런 사람일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가까워지다 보면 그렇지 못한 모습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처음에 가졌던 기대가 점점 바뀌어 간다. 그렇지만 에로스적 요소가 심하게 붕괴된 사람이 아니라면 실망한 모습이 있다고 해서 그 관계를 끝내버리지는 않는다. 즉 불편하거나 실망스러운 부분 역시 사랑의 한 부분으로서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상화했던 처음 상대의 모습에 실망해 그 관계를 파괴하고, 또 누군가는 성과 사랑이 심하게 분리되어 있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이 더 크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삶의 충동과 죽음 충동 중에서 무엇이 더 크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묶어주는 힘인 동시에 파괴적인 것들에 맞서 버티게 해주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그러므로 우리의 욕망 또한 불완전하다. 어쩌면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로스의 힘이 더 강한 사람은 불완전한 욕망과 파괴적인 힘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다. 불편하고 불완전한 것들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타나토스, 즉 죽음 충동은 통합하고 묶이는 것을 견뎌 낼 힘이 없어 무언가를 분리시키고 떨어뜨려 놓으려 한다.
그래서 에로스 혹은 삶의 충동은 안정되고 평화롭기만 하지 않다. 늘 그 안을 파고드는 불편한 것들을 받아들이려 애써야 하니까. 이는 내가 가진 것과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신체, 내 환상과 다른 타인의 모습, 나아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 이런 의미에서 현대 한국사회는 에로스 없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을 묶는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젠더, 정치, 계층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갈등이 1위인 사회가 된 이유는 이질적인 것들을 한데 모아 생각하고 화합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 떨어지고 흩어져 있는 상태가 곧 타나토스이므로.
결국 에로스는 성과 사랑을, 이상화된 것과 실망스러운 것을, 나와 다른 생각을 한데 모으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에로스가 더 크되 타나토스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분리되어 다른 곳에서 파괴적인 것을 쌓아두게 될 테니 말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무엇이 더 큰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한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