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혹은 이를 다른 질문으로 번역해볼 수 있을 듯하다. 심리적 고통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의식주를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사랑과 애정의 문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관심은 인류가 시작된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되어 오는 심리적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이는 심리적 사건(psychological event)이라고 불릴 만하다. 곧 이야기 하겠지만 연애와 사랑은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눈 앞의 대상 그 자체보다는 내면의 '심리적 현실'에 더욱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과거 원시 인류들도 (그 형태는 다소 비문명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게 사랑 혹은 에로틱한 감정을 느꼈을 테고, 지금의 현대인들 역시 그러하다. 물론 현대사회는 자본과 경제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이로 인한 사회적 생존의 문제가 중요해지면서 '에로스를 향한 열망'이 억눌리거나 왜곡된 면이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음지를 통해서나 다양한 문화적 대체물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이처럼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사랑할 대상을 찾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론적으로는 출생과 종족보존, 철학적(혹은 일반 심리학적)으로는 자신의 반쪽을 만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등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이는 모든 인간은 환상(Phantasy)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환상이란 무엇일까? 굳이 그것을 표현하자면 '한 개인의 정신구조를 지탱시켜주는 심리적 실체'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 환상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이는 생물학적 본능의 차원뿐 아니라 한 인간이 태어나고 살아오면서 겪은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형성된 구성물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이 환상은 무서울 정도로 개인의 삶에 간섭하며, 삶의 모습을 지배한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Phantasy)은 일반적인 환상 혹은 공상(Fantasy)과는 구분된다. 후자는 의식적 수준에서의 환상을 의미하는 반면 전자는 그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갖는 '무의식적 환상'을 뜻한다. 이는 한 인간의 생각, 행동, 가치관 등 삶의 방식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강한 힘이다. 그리고 그 환상의 대상은 대개 무의식 속에서 '이상화된 대상'이다. 이는 과거 어느 시점에 나에게 큰 기쁨이나 쾌락을 주었거나 혹은 좌절시키면서 그것을 꿈꾸게 만든 대상의 특성을 포함하고 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언젠가 느껴보았거나 그러길 기대했던 어떠한 기쁨을 평생 찾으려 헤맨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장-다비드 나지오는 '사랑은 왜 아플까?'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우리를 자극해서 꿈꾸게 만들면서 실망시킨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의 결핍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꿈이 실현되건 그렇지 않건 그것이 언젠간 실현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거나 그에게서 버림받게 되면 우리의 정신구조를 일관되게 지탱해주던 구조가 무너지면서 그 자리에 '상실'이 자리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이유인데, 결국 현실의 그 대상이 떠나가서라기 보다언젠간 실현되리라 믿었던 환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의 상실은 물리적 상실 이상으로 감정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다. 환상이란 만약 그것을 갖게 된다면 과거에 느꼈거나 혹은 기대했던 엄청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기대이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실제 눈 앞의 대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일부이다. 그래서 환상이 무너진다는 것은 결국 내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과도 같다.
이에 대해 장-다비드 나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외부 인물 이상으로, 우리 욕망의 중심으로 되돌아온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다
결국 환상의 상실로 인해 고통을 느낀다는 말은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가지지 못해 괴롭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과연 그 환상의 대상을 갖는 것이 내가 꿈꾸던 최선의 기쁨을 보장해 줄 것인가? 분명한 건 그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즉, 내가 그토록 바란다고 믿었던 그것을 가졌지만 생각했던 기쁨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욕망의 대상' 자체보다는 그것을 그토록 바라는 (정확히는 그것을 바란다고 믿게 만드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어쩌면 최선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으로 느껴지는 그 대상이 나의 진짜 소망을 감추고 왜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진짜 소원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