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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r 26. 2024

[인터뷰집] 명함 없이 노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경향신문 젠더 기획팀)

누군가의 삶을 궁금해하는 시선은 따뜻합니다. 나 하나 잘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에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깊이 공감하는 마음을 내어놓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건 오직 온기 어린 마음뿐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려는 책은 그런 온기로 출발한 인터뷰집입니다.


명함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겐 쉽게 주어지는 것,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 하루에도 수천 장씩 뿌려지고 버려지는 것,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리를 과시하는 것, 능력을 증명하는 것,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위로.
한 장의 명함엔 여러 정보가 담겨 있지만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는 보여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평생 일한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삶의 주체이자 진짜 일꾼으로 살아온 그들의 가치를 기록하고 싶었다. (인사이트. 언니들의 장래희망 중)     


평생 일한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고 싶었다는 인터뷰어들은, 인터뷰이인 여성들의 노동 가치를 기록하는 마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명함 없는 여성들은, 자신의 생을 회고하는 과정을 통해 '늘 내 인생은 뭐였을까 생각하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밖에 없지 않나 생각했는데요. 이렇게 얘기해 보니까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되네요. (평생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에 헌신한 장희자(62세) 씨의 인터뷰 중)'라고 고백합니다. 정성껏 듣고 기록하는 마음에서 피어난 온기가, 성심껏 말하고 털어놓는 마음에 불씨를 일으킨 것이지요.


언급한 대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명함이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평생을 노동했지만 정당한 대우도, 대가도 받지 못한 채 가정에서,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엄마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사 노동, 돌봄 노동, 농사, 청소 등 가정과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하지만,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자주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독자이자, 관찰자인 저는 너무 분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정작 이야기 속 인물들은 지난 세월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시간을 돌이키고 싶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흘러와 지금에 이른 당신들의 삶이 좋다고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지, 납득도 이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어의 심정으로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읽고 있는데, 왜 그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던지요. 하나도 낯선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평생을 명함 없이 일했던 우리 엄마가, 우리 할머니가, 우리 숙모들이, 오랜 친구의 엄마들까지 떠오르고 또 떠올랐어요.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모두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책 속 인물들과 겹쳐지는 이들이 주변에 한두 명은 꼭 있을 겁니다. 이토록 고단하고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그만큼 흔하디 흔하다는 사실에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습니다.


엄마와 할머니 세대가 겪은 ‘명함 없는 생’의 고단함에 새삼 존경심이 듭니다. 평생을 식구들의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한 것도 모자라, 자식들에게 부양의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노년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이전 세대의 고단함이 눈물겹습니다. 그들의 노동으로 이만큼 윤택해진 삶에 취해, 그들의 이야기는 애써 외면해오지는 않았던가, 돌아본 시간이었어요.     


더 뼈아픈 사실은 지금도 그런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엄마 세대가 아니라 제 세대의 여성들도 여전히 ‘명함 없는 삶’에 생을 내어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지금 제 주변에도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느라 ‘명함 있는 생’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여성들이 많아요. 자기 이름 석 자 대신, 000의 엄마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녀들을 떠올리며 명함 없이 노동하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인터뷰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마음에 남는 문장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가 없는 노동에 삶을 헌신하고 있는 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과 헌신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요.


끝으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라고 외치는 그들의 생을 무한히 응원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일에 헌신한 당신의 삶은, 한 장짜리 명함에 담길 수도 없는 숭고한 삶이었음을 잊지 않으시기를.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드니까 너무 힘들었지만 도망가지 않았어요. 내 인생은 없다, 나는 돈 버는 기계다 생각하며 살아보자 했죠. (남대문 시장에서 칼국수 가게를 운영하는 손정애(72)씨의 인터뷰 중)   

60대. 나는 지금이 좋아요. 뭔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처럼 꿈틀거리는 마음이 좋아요. 글씨도 어떻게 써야 한다고 생각 안 해요. 쓰고 싶은 대로 그날의 마음을 담아서 써요. 요즘 내 마음을 글로 써봤어요. 동년배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은 글이기도 해요. “말도 안 되게 설렘과 벅참이 찾아올 거예요. 당신에게.” (글 쓰는 사람 인화정(64세)의 인터뷰 중)     

인터뷰하면서 물어보니까는 내가 그 힘든 세월을,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살았나 싶어. 되돌아가라면 난 절대 안 가.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 아득해. 내가 그래도 한눈팔지 않고 일해서 지금까지 참 잘 살았구나 싶어. 지금은 편해. 마음 편하지. 몸도 편하지. 지금 버는 자체를 다른 사람들이 다 부러워해. “아직도 일 다녀? 참 부럽네” 그래(웃음).(36년 현역 광부 문계화(66세)의 인터뷰 중)     

딸이 저에게 ‘엄마 인생 시즌 2’라고 하는데요. 저는 ‘시즌 2’라기보다는 이제야 제 인생이 온전해진 것 같아요.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누구를 기쁘게 하려거나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너무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나이에 갇히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 오십 대 중반이 넘어가는데 갑자기 육십이 됐다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못할까.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명함이) 필요하면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게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 (‘나는 내가 명함이라는 이선옥(55세) 씨의 인터뷰 중)     

그들은 모두 한 권의 책이었다.(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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