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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Apr 02. 2024

[소설] '피지 못한 꽃'은 끝내 피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김이설)

드디어 봄꽃들이 꽃망울을 한껏 터트리는 계절이 왔네요. 예년보다 꽃이 일찍 필 거라고 하더니, 어쩐지 꽃 소식이 자꾸만 늦어져 더 애가 타던 시간이었습니다. 모처럼 날이 좋고 공기도 맑던 어제, 혼자 아파트 단지를 두 시간이나 걸었습니다. 꽃들이 봉오리를 터트리고 나오기까지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냥 피어나는 꽃은 하나도 없지요. 모두 저마다의 시간을 견디고 버티다 드디어 때를 맞이했을 때, 수줍은 듯, 하지만 보란 듯이 망울을 틔웁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저마다의 꽃이 되어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김이설)’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직 피지 못한 꽃’으로 묘사됩니다. 이 소설은 ‘나’가 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움츠리고 버티고 견디던 시간을 적나라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에요.     


‘나’에게는 오랜 연인이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특별한 욕심을 내지 않았던 두 사람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범한 연애를 이어갑니다. 그 속에서 소박한 행복과 기쁨을 느끼던 ‘나’가 오랜 연인과 결별하게 되는 이유는 ‘나’의 동생 때문이에요. 학창 시절부터 눈에 띄지 않던, 너무나 평범해서 꿈조차 갖지 못했던 ‘나’와 달리, 동생은 공부도 잘했고 자기 길도 잘 찾아가던 모범생이었습니다. 그런 동생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그 결혼에서 가정 폭력을 경험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동생을 데리고 자신이 부모님과 함께 살던 작은 빌라로 와요. 동생의 네 살, 여섯 살 된 두 아이까지 함께요.      


부모님과 동생, 동생의 두 아이, ‘나’까지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안일과 육아뿐입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이, 오랫동안 시인 지망생으로 살던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일은 그뿐이에요.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해보기 전에는 얼마나 고단하고 지리멸렬한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 오직 그일 뿐입니다. 동생과 부모님이 경제적인 부분을 도맡는 동안, ‘나’는 당연하다는 듯 모든 집안일을 전담하고 두 아이의 육아를 책임집니다. 자기 아이를 키우는 일도 너무나 힘든데, 영유아기의 조카 둘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지는 상상 이상입니다.      


‘나’가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집안일을 책임지는 동안, 가족들은 ‘나’의 역할을 당연시하게 됩니다.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아요. 고마워하긴커녕 고생한다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나’는 동생네가 집에 온 이후로 한 줄의 시도 쓰지 못합니다. 자신이 피워낼 꽃은 봉오리 안으로 철저히 웅크려 둔 채, 오직 가족들이 저마다의 꽃으로 온전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나’가 겪어가는 집안일의 현장이, 육아의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져서 읽는 동안 많이 아팠어요.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을 꼽으라면 바로 이 현실적인 문장들이었어요. 제가 겪어 왔고, 겪어가는 중인 수많은 장면이 소설 속 문장들과 겹쳐지고 또 겹쳐져서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두 아이를 다 씻기고 나면 부지런히 이부자리를 깔았다. 아이들이 누우면 얼른 불을 끄고 아이들 사이에 누웠다. 첫째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쫑알거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이 뚝 끊겼다. 이내 고롱고롱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째는 깜깜한데도 혼자 손가락을 빨며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족히 한 시간은 저래야 잠드는 아이였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할 일이 더 남아 있었다. 두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들어야만 방을 나갈 수 있었다. 깜빡깜빡 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둘째가 저기 옷장 앞까지 굴러가 잠이 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아이를 이불 위에 눕히고 방을 나섰다. 피곤과 고단이 내 발목을 부여잡아 질질 끌려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루의 연장전이 남아 있었고, 그것까지 마쳐야 겨우 식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40쪽-41쪽)

아이들을 재우고, 설거지를 마친 후, 아침거리를 준비하고, 빨래를 개고, 집 안을 대략 정리한 다음에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꼬박꼬박 하루치의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 쓰레기를 버리고 나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겨우 하루치의 집안일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중략) 이 길로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멀리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저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청소와 빨래와 밥 준비와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103쪽)     

집안일이란 집에 있는 사람이면 하는 일, 바깥일이 없는 이가 하는 일이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가치로 환산할 의미조차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104쪽)     


저도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오직 제 안의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던 때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만의 빛깔과 향기를 가진 꽃을 피우기 위해 누군가의 시간을, 누군가의 삶을 소모해가고 있다는 사실을요. 이제 와 새삼 눈물겨운 이유는, 지금 제가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시간을 소모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제가 누군가를 위해 소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 내가 사라진다는 느낌은 꽤 절박하게 삶을 잠식합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겪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삶의 무게를 느끼며, 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삶을 다시금 떠올려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의 두 번째 매력을 꼽자면, ‘필사의 밤’이라는 제목처럼 ‘나’가 밤마다 필사하는 시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는 것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일부만 인용된 시의 전문을 찾아보고 포스트잇에 필사하여 책에 붙여보았어요. 어쩜, 이토록 절절하고 아린 시들인지. 시를 필사하는 동안 마치 제가 ‘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슬픔을, 절망을, 어둠을 헤매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중 한 편의 시를 소개해드립니다.


시 쓰는 여자 (이선영)

시를 쓰기 전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이불을 깔았다 개고 걸레질을 하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밥을 안치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여자
상한 음식을 손으로 쓸어 담으면서
음식이 상하는 만큼 나날이 상해 간다고 느끼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여자
아이 실내화를 빨고
숙제와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돈을 벌고 돈을 내야 하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
시를 읽어야 하는 여자
읽으면서 시란 정말 알 수 없다고 푸념하는 여자
읽으면서 시를 써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여자
읽으면서 써 온 반생과 써야 하는 여생을 후회하곤 하는 여자
푹푹 한숨 쩌 내는 여자 퉁퉁 불어 투덜거리는 여자
이윽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여자
하루가 저물면 시는 쓰지 않고
식탁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
어디다 시를 두고 온 사람 모양
골똘히 아래만 보고 있는 여자
머릿속은 가득하지만 시만 들어 있지 않은 여자
뒤숭숭한 세간들 사이로 시만 실뱀처럼 빠져나간 여자
차 있으나 늘 텅 비어 있는 여자

      

오직 자기만의 꽃을 피워보려 '시 한 편' 쓰기도 전에, 어쩜 이렇게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을까요. 삶이 지속되는 동안, 하고 싶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 책임져야 하는 일을 우선하는 순간이 많다고 하지만. '나'와 '시 쓰는 여자'의 삶은 처절할 정도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참을 머물렀던 것은 제 삶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감각 때문이었어요. 비단 저뿐일까요. 집안일을 책임지는 수많은 이가 저와 꼭 같은 감각을 느낄 테지요.


가족을 위해 자기만의 꽃 피우기를 포기했던 ‘나’의 생은 어떤 결말에 다다랐을까요. 영원히 그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희생과 헌신을 거듭하며 소모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혹여라도 자기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과감하게 현실을 벗어났을까요.      


소설의 결말을 미리 알려드리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없으실 테니. 제 글은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결말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하신 분들은 찬란하게 피어나는 꽃나무 아래에서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을 꼭 읽어보시길. 그리하여 나의 꽃망울을 틔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의 희생을 딛었던가 떠올려 보는 시간이 되시길. 나아가 생의 꽃망울을 틔우는 일은 무엇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고, 부단한 애씀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봄날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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