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Apr 09. 2024

[소설집] 전에 없던 소설, 전에 없던 작가

<회색인간> 김동식

[이번 글은 2023년도 월간 공군 4월호에 게재한 원고였음을 밝혀둡니다.]


새해 다짐을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벚꽃이 지는 계절이 왔네요. 문득 꽃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봄의 특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특권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해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드는 4월입니다. 이번 주에는 아주 독특하고 (어쩌면) 기묘한 소설집 하나를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입니다.


본격적으로 소설집 이야기를 하기 전에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을까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있으니까’가 아닐까 해요. 소설의 재미는 개그 프로그램처럼 웃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소설은 너무 슬퍼서, 어떤 소설은 너무 무서워서, 어떤 소설은 너무 아름다워서 재미있습니다. 결국 소설의 재미는 ‘몰입’에서 옵니다. 현실적인 소재든, 비현실적인 소재든, 몰입해서 읽다 보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소설이 있어요. 그게 바로 재미있는 소설이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를 제대로 구현한 소설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은 정말 재밌는 소설집이었습니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만큼이요! 소설‘집’이라는 것은 하나의 소설로 이루어진 책이 아니라, 여러 단편이 모여 있는 모음집이라는 말인데요. <회색 인간>의 경우 한 편의 내용이 일반적인 단편보다 더 짧아서 길어도 스무 쪽 내외였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싶으면 금세 몰입하게 되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데, 심지어 이야기가 짧아 아쉽기까지 합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 또 궁금증이 커지고 또 금세 끝나 아쉽습니다. 전체 페이지가 삼백 페이지가 넘으니 그리 얇은 소설집은 아니었는데, 손에 들자마자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만큼 재미있었어요.


<회색 인간>이 재미있었던 이유는 첫 번째로 소재들이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극대화된 소재들이었어요. 외계 존재, 식인 건물, 지저 세계, 뱀파이어, 늙지 않는 인간, 예언력 등 다분히 sf적인 소재들이 이야기마다 등장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sf소설처럼 깊이 있는 과학적 지식이 바탕에 깔린 소설들은 아니었어요. sf를 즐겨 읽는 분들에게는 오히려 소재나 상상력이 유치하다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이 짧은 소설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 이 소설들이 관통하는 메시지는 인간 본성에 닿아있었어요. 소설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며, 어떻게 좌절되는지 보여줍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의 이타심이 발현된다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서술방식이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소설이라고 하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구조를 갖기 마련입니다. 단편이라 하더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고(발단) 사건이 발생하고(전개), 심화되었다가(위기, 절정)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결말)가 되지요. 그런데 <회색 인간> 속 단편들은 그런 단계를 완전히 무시했어요. 인물에 대한 묘사도 전혀 없습니다. 첫 장면부터 사건이 시작되고, 사건에 몰입하려고 하면 이내 반전을 주며 소설이 끝나버렸어요. 평범한 소설 전개 방식에 익숙한 독자들일수록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소설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움이 황당함으로 이어지지 않고, 궁금증으로 이어졌습니다. ‘도대체 이 소설을 쓴 작가는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호기심이 생겼어요.


<회색 인간>을 쓴 작가 김동식의 이력은 굉장히 독특합니다. 한 번도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으며, 소설을 쓰기까지 읽은 책이라고 해봐야 열 권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해요. 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다, 서울에 터를 잡은 외삼촌의 제안으로 아연 주물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이후 십 년 동안 뜨거운 아연을 다루어 액세서리나 지퍼, 단추 등을 만드는 노동자로 살았어요.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고, 일이 끝난 후 그 상상을 ‘오늘의 유머’라는 인터넷 게시판에 쓰기 시작한 것이 소설 창작의 시작이었습니다.


김동식 작가의 이력을 보면 자연스럽게 ‘호모 나랜스’,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모든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한다’라는 명제대로 김동식 작가는 그리 순탄하지도, (육체적으로) 편안하지도 않았을 순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능’을 실현하며 잘 지나온 것 같아요. 글쓰기를 배운 적은 없지만 이야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덕분에, 더욱 독특한 자기만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겠지요.


이쯤이면 <회색 인간>과 작가 김동식, 모두에게 관심이 생기시지 않나요? 손에 잡는 순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놓을 수가 없는 소설! 오직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야기 세계를 구축한 작가! 완연한 봄날, 이들과 함께 해보시는 건 어떠실지요!



이전 08화 [소설] '피지 못한 꽃'은 끝내 피어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