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마녀들>, 김태우
여성으로 사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제 삶에서 가장 먼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80년대~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제게 허락된 놀이는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인형 옷 입히기 놀이 같은 것들이었요. 남자아이들이 전쟁을 놀이 삼아하는 동안에도 ‘전쟁’이라는 단어에 큰 관심을 둔 적이 없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전쟁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제 삶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훅 들어온 계기가 있었어요. 아이를 키우는 집 벽에는 으레 여러 벽보가 붙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중에서도 세계지도와 한국지도는 거의 필수인데요. 조금 자란 아이가 어느 날 문득 북한 지역에 대해 묻기 시작했어요. 아마 전래동화에 나오는 백두산이라는 지형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는 아이에게, 백두산에 가려면 중국으로 돌아서 가야 한다고 말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아이에게 한반도의 중심을 가르는 휴전선을 알려주었습니다. 휴전선이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우리나라는 지금 전쟁을 쉬고 있는 나라고, 휴전은 그런 뜻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휴전을 위해서 이 선을 그었고 이 선 위쪽은 북한, 아래쪽은 남한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우리는 북한에 갈 수 없고 북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 뒤로 아이가 국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함께 태극기와 인공기를 찾아보기도 했어요. 아이는 점차 휴전선을 중심으로 갈라진 나라에 대해 궁금증을 자주 표현했어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는 휴전 국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남성들은 성인이 되면 군대에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말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터졌고, 아이와 가끔 관련 뉴스를 찾아보며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어요. 아이와의 대화에서는 전쟁이 주는 공포와 전쟁으로 인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불행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적 없는 엄마와 아이의 대화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한편으로 더 공포스럽기도 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냉전의 마녀들>은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독서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요. 아마 독서모임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사보지 않았을 책이었어요. 사회과학서를 자주 읽기는 하지만, 앞서 길게 말씀드린 것처럼 전쟁은 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거든요. 제법 두꺼운 두께도, 너무 강렬한 표지도 한몫했을 겁니다.
<냉전의 마녀들>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전쟁의 실상을 알아보고자 세계 각지의 여성들이 조사단을 꾸려 북한을 찾아간 이야기를 다룹니다. 18개국에서 모인 21명의 외국인 여성들은 직업도 나이도 모두 달랐습니다.(대부분이 각국에서 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른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국제민주여성연맹'의 초청에 응한 한국전쟁 진상 조사 위원들이었어요.
이들이 주로 관찰하여 보고서로 작성한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주로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였습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여성주의 평화 운동을 이루고자 했어요. 이들이 남긴 기록(국제여맹 조사보고서)은 전쟁의 참상을 매우 적나라하게 담고 있지만, 이 보고서가 '미국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일관했던 까닭에 출간 직후부터 소련과 공산당의 선전 팸플릿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들으면서 철저하게 금압되었-(8쪽)'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요.
<냉전의 마녀들>은 조사위원들이 전쟁의 중심에서 직접 전쟁을 관찰하는 모습을 조사위원 중 한 사람인 ‘펠런’의 시선을 통해 그려냅니다. 사회과학서이자 무거운 내용을 다루지만 어렵지 않게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그 과정을 서사적으로(마치 1인칭 소설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한 형태로)서술하고 있거든요.
<냉전의 마녀들>을 읽으며, 전쟁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특히나 여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똑똑히 확인했습니다.(정말 읽기 힘들었습니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너무 처절해서요.) 철저하게 파괴된 삶을 목격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껏 제가 너무 피상적으로 지니고 있던 전쟁에 대한 이미지와 공포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어요. 그 삶을 현실로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차별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일상을 파괴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현장을 담고자 했던 이들이 여성이었던 점, 유서까지 써두고 북한으로 향했을 만큼 죽음의 가능성을 두고도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점, 결국 그것은 평화를 향한 그들의 열망이 이루어낸 일이었던 점, 마녀가 되기를 각오하고도(대부분의 조사위원들은 각국으로 돌아간 후, 충격적인 보고서 내용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됩니다.) 자신들이 들은 목소리와 목격한 현장을 끝까지 부정하지 않은 점 등은 충격적일 정도로 인상 깊었습니다.
독서모임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모임의 호스트이신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전쟁 영웅은 결국 많이 죽이는 사람이며, 그런 이들의 이야기가 결국 역사에 기록된다.' 생각해 보면 제가 교과서로 배워온 역사 속 전쟁은 모두 영웅의 이야기였고, 그들은 모두 타인의 목숨을 많이 앗아간 이들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일었어요. 많이 죽인 사람일수록 더 크게 추앙받는다는, 전쟁 상황에서만 가능한 이 아이러니! 권력을 쥐기 위한 '몇'의 판단으로 일어나는 전쟁은, 권력과 무관한 '수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리고도 '몇'은 대개 살아남아 역사가 되고, '수많은 이들'은 죽음으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힙니다. 이걸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아프다고 해야 할까요. 분노가 인다고 해야 할까요.
잊힐 수 있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만나는 일은 읽기 힘든 것과 별개로 무척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공기놀이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던 여자 아이가, 이제라도 <냉전의 마녀들> 같은 책을 읽고 전쟁을 배우고 전쟁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성이 되었음에 안도했어요.
여전히 우리나라는 휴전국가입니다. 달리 말하면 언제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두렵습니다. <냉전의 마녀들>은 두려움에 기름을 붓고 불씨를 던지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것은, 충분히 두려워해야 자꾸 떠올릴 수 있고 다른 결론에 닿도록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두려워해주실 분께! <냉전의 마녀들>을 추천해 드립니다.
덧붙임. 여담이지만, 이 책은 절판 위기에 놓여 있던 책이었다고 해요. 독서모임을 주관하는 독립서점의 대표님이 책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알고 출판사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출판사에서는 이 책의 재쇄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의미 있는 책이 많은 분들의 책장에 꽂힐 수 있기를, 마음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음 한 주는 연재를 쉽니다.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었거든요.! 우리는 8월에 다시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