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Aug 07. 2024

[소설] 흉터를 반갑게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로 해요.

<페이스>, 이희영

놀라울 정도로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요. 정말 이렇게 더워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다들 무탈한 날들 보내고 계신지, 이 더위를 핑계로 오랜 인연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여름날입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시원한 도서관에서, 북카페에서 재밌는 소설 한 편 읽는 것만큼 좋은 피서가 없을 텐데요. 저는 한참 방학을 보내고 있는 두 아이 덕분에 도서관도 북카페도 엄두를 낼 수 없지만,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에게는 그런 여유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런 마음을 담뿍 담아 오늘은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소설 한 편을 소개해드리려고 해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소설의 제목은 ‘페이스(이희영)’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해요. (신선한 설정이죠?)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오직 자기 얼굴만 보이지 않아요. ’나‘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얼굴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다기보다는 ‘이상하게 보인다’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아요. 어떤 날은 뿌연 안개처럼 보이고, 어떤 날은 무지갯빛 덩어리로 보이니까요. 다른 사람의 얼굴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도 모두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정말 오직 자기 얼굴(페이스)만 제대로 볼 수 없어요.


‘나’의 부모님은 딸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온갖 병원을 쫓아다니며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린 ‘나’는 그냥 자기 얼굴이 보인다고 연기를 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는 판단을 내려요. (다른 대상을 모두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요.) 이후 십 대 후반이 되도록 부모님을 비롯하여 친한 친구들마저도 ’나‘가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느 날, 교실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고로 ’나‘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습니다. 스무 바늘이 넘게 꿰매야 할 만큼 큰 상처였는데요. 자기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하지만, 그 상처를 보는 부모님이나 (비록 사고였더라도) 상처를 입힌 친구 ‘묵재’의 눈에는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에게 그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언제나 이상한 형체 혹은 형체도 없는 안개처럼 보이던 얼굴에서, 도드라진 상처가 또렷하게 보인 겁니다.


태어나 한 번도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던 ‘나‘는 얼굴에 생긴 상처를 통해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마주하게 된 셈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상처나 흉터도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데, ‘나’는 상처를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면서 오히려 상처를 긍정하기에 이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흉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눈에 보이는 육체에나, 보이지 않는 마음에나."
묵재는 언제나처럼 조용하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다시 말을 잇는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를 정확히 보는 게 의외로 힘들다고 생각해. 그런데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인해 비로소 보일 때가 있어. 그것이 더 나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애써 감추려 했던 아픔이 수면으로 올라올 수도 있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뻔한 말이지만 어쨌든 흉터는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상징이니까, 굳이 감춰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148쪽)


‘나’의 말처럼 스스로를 정확히 보는 사람이 정말로 얼마나 될까요. 매일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지만, 거울 속에 내 모습이 정말 나의 전부일까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 모두는 수많은 상처나 흉터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인정하고 정확히 인지할 때 비로소 내 모습을 정확히 ‘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새겨진 상처나 흉터를 보고 싶지 않아 합니다. 가능하다면 철저히 지우고 싶어하고, 외면하고 싶어하지요. 상처나 흉터를 마주하는 일은 아프고 슬픈 일이니까요. 지우고 외면한다고 없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기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자 있을 때면, 그 흉터만 거대하게 보여요. ‘이 흉터가 내 얼굴을 망쳤어, 내 삶을 망쳤어.’ 되뇌며 스스로를 갉아먹기도 합니다. 참 희한한 일이지요. 그토록 외면하고 부정하면서도 그 안에 함몰되어버리니까요.


저 또한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오래도록 외면해 온 상처와 흉터들이 있어요. 그 일들은 여전히 또 영원히 외면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 흉터들이 저라는 사람을, 제 페이스를 이루는 일부일 텐데도 그래요. 잊을 수도 없고, 잊히지도 않는 흉터를 품고서도 잊은 척하는 일은 사실 더 선명히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잊은 ‘척’ 외면하는 데에는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이상의 에너지가 쓰이고, 에너지를 쓰면 쓸수록 더 선명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에 실수로 물감을 흘린 적이 있어. 밑그림 다 그리고 색칠을 하려는데 물감 한 방울이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거야. 맨 처음 든 생각은 아! 망했다. 열심히 그린 그림이 다 날아갔구나. 다시 그릴 시간도 없 고, 뭐, 어쩔 수 없단 생각에 그냥 채색을 시작했어. 색칠하면서도 그 물감 자국만 자꾸 도드라져 보이잖아. 에라 모르겠다, 이왕 망친 거 대충 하자, 그렇게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거짓말처럼 물감 흘린 자국이 안 보이는 거 있지?"(중략)
처음에는 유독 얼룩만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 한 방울이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결국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의 문제다. 삶의 얼룩들에 한번 시선을 빼앗기면 더 크고 소중한 것들이 안 보인다.(168쪽)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인 흉터는 더 이상 스스로를 갉아먹지 못합니다. ‘이건 내 생의 일부야!’라고 생각해 버렸는데, ‘이미 지나간 일이야!’ 인정해 버렸는데 이미 생긴 흉터가 더는 뭘 어쩌겠어요. 더 이상 과거가 된 흉터에, 삶의 얼룩에 시선을 뺏기지 않기로 했을 때 비로소 ‘더 크고 소중한 것들‘이 보이겠지요. 온전한 ’나‘의 모습이요.


소설을 덮으며,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상처들을 마주해 봅니다. 어떤 상처는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상처가 지금의 제 삶을 얼룩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해봐요. 그 상처에 모든 시선을 뺏긴 채, 정작 지금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금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다짐도 해봅니다.


혹,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에게도 그런 상처가 있으신가요. 저를 비롯한 여러분에게 용기가 되어줄 주인공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스스로의 흉터를 ‘반갑게’ 맞이하며 더 크고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는 우리가 되기로 해요.


"사실 처음에는 아팠는데, 이제는 괜찮다는 거야. 네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흉터랑 그럭저럭 잘 지내. 어쨌든 내 일부가 되었으니까."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던 내 얼굴의 아주 작은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내겐 전혀 중요치 않았다. 흉터나 상처라 판단하는 건, 그러니 빨리 없애고 지우라 말하는 건, 모두 타인의 시선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침마다 볼 수 있는 이 흉터가 반갑고 또 좋다. (149쪽)










이전 16화 [사회과학서] 한국 전쟁의 참상을 다룬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