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문정희)
[2024 시 쓰는 가을] 첫 번째 시
도착 (문정희)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에 도착했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 더 많았지만
아무것도 아니면 어때
지는 것도 괜찮아
지는 법을 알았잖아
슬픈 것도 아름다워
내던지는 것도 그윽해
하늘이 보내 준 순간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이파리들의 자유
벌레 먹어
땅에 나뒹구는 떫고 이지러진
이대로
눈물나게 좋아
이름도 무엇도 없는 역
여기 도착했어
출처:<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어딘가에 도착한다는 것은 열심히 걸어왔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때론 멈추고, 때론 넘어지고, 때론 뒤돌아서고, 때론 주저앉았더라도 결국에 끝까지 걸어왔다는 말이에요.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 삶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져도 괜찮아요. 슬퍼도 괜찮고요, 내던져져도 괜찮습니다. 모두 괜찮아요.
내가 키워 나로 자란 나무가 맺은 열매(결실)는 땅에 떨어지면 금세 벌레 먹습니다.
자유로운 듯 보이는 이파리도, 이내 아래로 아래로 나뒹굴고 이지러질 테고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좋아요.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가지를 뻗어, 잎을 피우고 열매 맺었으니까요.
모진 순간들을 견디며 이미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도착했으니까요.
그 자리가, 그 시간이 대단한 이름을 얻지 못했어도,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남들 눈에는 낡고 초라한 역일지라도.
괜찮습니다. 충분히 좋아요.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직 도착하였기 때문입니다.
도착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어디에 도착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