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말한다(윤보영)
[2024 시 쓰는 가을] 네 번째 시
그리움을 말한다(윤보영)
그리움 한 자락 담고 사는 것은
그만큼 삶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그립거든 그리운 대로 받아들이자
마주 보고 있는 산도 그리울 때는
나뭇잎을 날려 그립다 말을 하고
하늘도 그리우면 비를 쏟는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할 사람이다
그립거든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고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받아들이자
가슴에 담긴 그리움도 아픔이 만든 사랑이다
가슴에 담고 있는 그리움을 지우려 하지 마라
지운 만큼 지워진 상처가 살아나고
상처에는 아픈 바람만 더 아프게 분다
그리울 때는
무얼 해도 그리울 때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리워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게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리워 하자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고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다
<커피도 가끔은 사랑이 된다>
오늘의 시 <그리움을 말한다>는 해설이 필요한 시는 아닙니다. 제목 그대로 ‘그리움’을 말하는 시로, 시어나 시행에 난해한 비유와 상징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오늘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내보려고 합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제가 교사가 된 첫 해, 중학교 1학년 학생들과 시 수업을 하던 중이었어요. 교과서에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가 나왔습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라는 시행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대한민국의 국민시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시죠. 아무튼,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는 고향이라는 개념부터 흐렸기에 시를 통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꽤 난감했어요. 그냥 무작정 외우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제 고향 이야기, 제가 고향을 떠나서 느꼈던 감정 등을 주절주절 이야기했던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합니다.
그날 이후로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자주 생각했어요.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 그리움을 느끼지?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이지?’ 생각에 꼬리를 물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움을 꼭꼭 씹다 보면, 애정이 즙처럼 흘러나오는구나.’
한때 사랑했지만(어쩌면 지금도 사랑하지만) 이별해야 했던 누군가, 그때는 좋은 시절인지 몰랐지만(어쩌면 그때도 알고 있었겠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되돌릴 수 없는 애틋한 공간, 그런 대상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일렁입니다. 애정 어린 대상을 다시 만날 수 없을 때, 애정 어린 시공간을 다시 돌릴 수 없을 때 ‘그립다’ 말하게 되어요.
‘그리움 한 자락 담고 사는 것은/ 그만큼 삶이 넉넉하다는 뜻이다’라는 첫 연이 깊이 와닿는 이유입니다. 그리운 대상이 있다는 것은 한 시절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했다는, 그 시절을 충실하고 성실히 살아냈다는 반증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리움이 왈칵 밀려오는 순간이면 조금 슬퍼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움은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정이니까요. 그리움이 깊고 짙을수록 돌아가고픈 마음은 간절할 테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에서는 ‘그립거든 그리운 대로 받아들이자’라고 합니다.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리워하자’라고 해요.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고/그게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다’라면서요. 그리움이 밀려오면, 사실상 외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를,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워해본 분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실 거예요. 그리움은 애써 외면할수록 오히려 더욱 짙어지는, 참 희한한 감정입니다.
그러니 시의 말처럼, 그냥 그리워하기로 합니다. 그 사람을, 그 시간을, 그 공간을 곱씹어가며 아주 작은 부분까지 떠올려 보기로 해요. 그렇게 꼭꼭 씹어 삼켜, 그리움이 무사히 소화되고 나면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기에 참 좋은 계절입니다. 바람의 온도가 많이 낮아졌어요. 푸르던 이파리도 색을 바꿔가며 아래로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 하강의 계절에, 이미 잃은 것들을 한껏 그리워하다 보면 또 한 해가 저물겠지요. 어쩌면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