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기획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후기
KBS에서 추석 특집으로 조용필 공연을 녹화하기 위해 고척 돔을 대관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회사였다. 어줍잖은 효심으로 동료들과 사무실에서 조용필 무료 콘서트 예매를 시도하다가 상상 초월의 대기 인원에 바로 포기해버린 나는, 천운을 타고나 이 공연을 직접 갔던 친구의 후기에 배 아파하며 방송 날을 기다렸다.
내가 기대한 것 하나는 조용필의 공연이 갖는 탁월함이 어떻게 방송으로 잘 전달될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같이 보는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였다. 숱한 스타디움 콘서트를 거쳤고 불과 작년에도 새 정규 앨범을 내며 공연을 했던 현재의 그가 돔 경기장에서 해내는 공연이 어떨 지도 궁금했지만, 조용필의 전성시대였던 80~90년대를 청소년과 청년으로 살아낸 우리 가족들에게 지금의 조용필 공연이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 지가 더 궁금했다. 내가 조용필의 시대 이후에 태어났지만 가족들을 통해 조용필의 히트곡을 체득하다 보니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됐다.
공연 시작 전 VCR은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조용필의 대단함을 강조했다. 음반 1000만 장 판매나 일본 방송 출연 같은 기록도 적혀 있었지만, 아무래도 공연을 방송국에서 주관한 만큼 ‘가요톱10’ 1위나 가요대상 수상 등 방송국에서의 기록을 크게 강조했다. 전년도 가수왕 자격으로 올해의 가수왕이 자신임을 발표하다가 울먹이는 영상 클립이 그 백미였는데, 이걸 본 아빠와 큰이모부는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심드렁한 말투로 “자기구만" 을 외치셨다. 그 시절을 경험하신 어른들에게 조용필의 인기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통해 인기를 강조하는 자막에 놀랄 가치를 느끼지 못하셨다.
‘가요톱10 5주 1위'보다 가족들의 심장을 더 뛰게 한 자막은 ‘coming soon’으로 뒤에 나오는 곡을 예고할 때였다. ‘coming soon’에 ‘바람의 노래', ‘Q’, ‘모나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여행을 떠나요'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나오자 가족들이 모두 환호했다. ‘그 겨울의 찻집', ‘Q’, ‘바람의 노래' 같은 명 발라드가 나오니 가족들이 어김없이 한 목소리로 따라불렀다. 우리 가족 중 조용필 콘서트에 가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모나리자'가 나오니 모두가 공연이 막판에 다다랐음을 직감했고 ‘여행을 떠나요'가 마지막 곡일 거라며 한 목소리로 예언하기까지 했다. 막내이모가 수시로 외친 “기도하는~ 꺄아아악!” (’비련') 이나 아빠가 좋아하는 ‘한 오백년'은 이날 나오지 않았는데, 불러주지 않아서 아쉬운 곡들의 면면을 보면 조용필은 히트곡이 너무 많아서 2박 3일은 공연해야 할 거란 어른들 말씀이 과언이 아니었다.
이 방대한 히트곡 레퍼토리가 같은 곡 하나 없이 전부 또렷한 차별점을 갖추었다는 점이 새삼 놀라웠다. 트로트, 발라드, 록, 오페라 등 사운드가 다양하고, 목적이 얼핏 비슷해 보이는 곡들 간에도 디테일에 큰 차이가 있어 한 사람의 곡으로 장시간의 공연을 채우는 데에 전혀 지루함이 없었다. 이 모든 곡을 한 공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것은 위대한 탄생의 연주력이었다. 선 굵은 기타를 내세운 풍성한 연주는 조용필의 록스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힘 있고 뜨거운 분위기를 기반으로 이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한 줄기로 묶어냈다.
공연 실황을 통해 모아 들으니, 그 무수한 히트곡들이 너른 스펙트럼을 충실하게 아우르면서도 가요적 안배를 빼놓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다. 친숙한 보컬 전개를 통해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를 만든 뒤,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청자의 귀에 화려하고 꽉 차 있되 이질적일 소리나 기법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그의 히트곡들이 공통적으로 취한 전략이었다. ‘단발머리', ‘청춘시대', ‘못찾겠다 꾀꼬리' 같은 곡들을 신나게 따라 부르다가 문득 ‘단발머리'의 한국 가요 최초 신디사이저 활용 기록이나 ‘청춘시대' 속 진득한 메탈 사운드, ‘못찾겠다 꾀꼬리'의 재미있는 사운드 조합이 귀에 들어오다 보면, 음악적 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그의 음악이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방송을 보던 아빠가 “조용필이 남진, 나훈아 시대를 제패하고 동서 대통합을 이루었는데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했는데, 음악적 역량의 크기 차이를 곧 성과와 위상의 차이로 잇는 추론은 지극히 합당했다.
큰 글씨 자막으로 적힌 가사를 자세히 보니 섬세한 필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가수 개인의 자아를 한 발 뒤로 하고 광범위한 청자가 공감할 여백을 남겨둔 점이 눈에 띄었다. 조용필 곡마다 등장하는 대중에 대한 고려 지점은 때로는 당대 청중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통로였고, 때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내게도 감동을 주는 초월성을 가졌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재일교포 귀국이 당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여행을 떠나요'의 가사는 1985년의 대중이 생각하는 여행의 형태를 알려주었다. 한편 1991년에 발표된 ‘꿈'의 가사는 2024년에 타지 생활을 시작한 내게도 위안이 되었으며, 삶이란 곧 사랑이라 이야기하는 ‘바람의 노래'의 가사는 결코 시대를 타지 않았다. 대중음악이 팬덤 문화의 최전선에 서며 아티스트와 청자의 개별성에 주목하게 된 최근 추세에 익숙해진 내게는 이처럼 ‘모두의 노래'를 지향하는 접근이 되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영어 비중이 높은 한국 음악에 익숙해졌던 내게는 친근하고 간결한 우리말을 사용하여 정서를 느끼고 따라 부르기 쉬웠던 가사가 새삼스럽게도 좋았다.
한국에서 공연 문화가 지금만큼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대를 사신 어른들에게, 이번 조용필 공연 중계에 등장한 최신식 공연 연출은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정교한 비디오 연출과 빔 조명, 그리고 이와 어우러진 중앙제어 응원봉 연출을 어른들은 무척 신기해 하셨다. 특히 어른들은 중앙제어 응원봉 연출을 난생 처음 보고 무척 놀라워하셨다. 이처럼 아이돌 공연에서 볼 법한 현대적인 공연 연출도 최근까지 신곡을 내며 세련미를 잃지 않는 현역이고자 하는 조용필과 무척 어울리는 조합 같았다.
그런 연출이 빛을 발한 곡이 바로 ‘태양의 눈'이었다. 이 곡은 2003년에 발매되어 다른 곡들에 비해 어른들의 귀에 덜 익었지만, 스크린과 백댄서를 동원한 화려한 연출과 뮤지컬을 차용한 웅장한 연출이 집안 어른들의 눈길을 끌었다. 큰이모부가 그걸 보고 인터넷에 ‘태양의 눈'을 검색하여 곡의 히스토리를 줄줄 읊었고 둘째 이모가 거기에 맞장구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좋은 공연이면 으레 있게 마련인 ‘공연을 통해 재발견되는 곡' 역할이 이번에는 ‘태양의 눈'이구나 싶었다.
이처럼 현대적인 연출을 의미 있게 만든 것은 결국 가창자 조용필의 뛰어난 기량이었다. 아빠는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나 ‘허공' 같은 고난도의 곡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화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여전한 실력에 놀라셨다. 이후 공연이 후반부로 향할수록 더해지는 무대 장치와, 2시간이 넘는 공연 후반부에도 ‘모나리자'나 ‘여행을 떠나요' 같은 신나는 곡을 힘 있게 부르는 모습을 보니 온 가족이 경이로움을 느꼈다. 어른들은 수시로 네이버에 ‘조용필 나이'를 검색하셨는데, 만 75세 노인이 몇만 관중 앞에서 스타디움 콘서트를 끌어가는 광경은 중년의 어른들에게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참고로 우리 집 어른들은 중노년 가수들의 기량과 위상을 평가하는 데에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대시는 편이다. 우리 집 어른들이 중노년 이상의 뮤지션에게 붙여주는 ‘전설', ‘레전드' 같은 호칭을 의아해 하시거나 비웃으시는 경우를 꽤 많이 봤다. 어른들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가요무대>나 여러 케이블 방송처럼 중노년 이상의 가수들이 서는 무대를 나보다 자주 접하시는데, 대중음악사가 공인한 전설급 아티스트도 무대 위에서 떨창이나 부정확한 음정, 부족한 호흡 등 녹슨 보컬 기량을 보여줄 때는 정말 가차없는 평가를 내리신다. 아무래도 나는 젊은 세대이다 보니 중노년 세대 가수를 대할 때 그분들이 겪어온 세월과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게 되는데, 어른들에게 이 오래된 가수들은 세월에 대한 예의를 굳이 감안하지 않아도 되는 동시대 사람이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중심에서 물러나야 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더 냉정한 평가를 내리시는 것 같다. ‘테스형'도 자기복제라고 비판하며 ‘Bounce’도 싫어하시는 것을 보면 그렇다.
조용필의 이번 공연은 이 어른들의 냉정한 잣대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어른들이 종종 옛날 가수의 무대를 보며 지금 보면 별로인 것도 옛날엔 즐길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즐거워했을 뿐이라는 평가를 내리시기도 하는데, 위대한 탄생이 연주하는 조용필의 히트곡 레퍼토리는 이 어른들이 그저 가장 탁월한 것을 가장 열심히 좋아했을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떨창이나 호흡 부족 없이 특유의 쩌렁쩌렁한 성량을 뽐내고, 멘트를 최소화한 채 노래를 연달아 부르며 관객을 열광시키는 에너지를 끝없이 뿜어내는 조용필의 모습이 어른들에게 준 충격은 컸다. 우리 집 어른들이 오래된 가수의 무대를 보며 자신들의 청춘과 추억을 함께한 이가 건강하고 치열하게 나이 들어 지금도 빼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순수하게 감동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 정말 처음 보는 일이었다. 조용필이 평생 연습과 단련을 강조하며 구도자적인 자세로 음악을 대해 온 결과가 눈앞에 펼쳐지니, “무대 위에서 죽는 것이 로망”이라는 이야기에 평소와 달리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되신 것 같았다.
이번 조용필 공연 중계는 관중을 유독 자주 비춰줬다. 환호하는 사람, 우는 사람, 춤추는 사람이 연이어 나오니 어른들은 “공연에 가면 정말 저렇게 되는구나" 하셨다. 수십 년 전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 때 일어났다는 속옷 투척 사건 썰을 언급하며 그런 열광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겠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조용필 공연 중계가 끝나자 어른들은 각자가 가본 공연에 대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싸이, 이승환, 박진영, 지드래곤, 패티김, 임윤찬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화두에 올라 다양한 행복 이야기가 펼쳐졌다.
우리 가족에게 이번 조용필 공연 중계는 조용필의 위대함에 놀라는 시간이자, 각자가 공연에 대해 가졌던 즐거운 추억을 나눌 기회를 마련해주는 시간이었다. 올해 말 예정된 조용필의 전국 투어 티켓이 전석 매진된 것을 보면 이런 집이 한두 집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도 언제 한번 우리 부모님께 공연 표 사 드려야지, 하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효도할 날은 언제 올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