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님 Aug 22. 2024

착한 아이 콤플렉스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다.

 마흔 살을 코 앞에 두고 나는 제2의 사춘기가 온 것처럼 많이 아프고 힘들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완벽할 수 없었던 워킹맘으로 살면서 어찌나 챙겨야 하는 날들이 많은지 내게는 모든 날들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나는 엄마, 아내, 딸, 며느리, 회사에서는 김대리로 살면서 그 역할로써 존재했다.

역할에 충실할수록 어느 순간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것처럼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럭저럭 체념하며 숙제하듯이 역할에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 나가며 버티고 있던 와중에 유독 나를 괴롭히는 그녀가 있었다.

바로 '나의 엄마'였다.

엄마는 명절이나 생일 등 본인이 누릴 수 있는 어떤 기념일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문자로 나를 떠보기 시작했다. 이번 명절은 친정부터 오라는 둥.. 이번에는 동생네와 다 함께 여행을 가자는 둥.. 그러다가 내가 묵묵부답이면 또 안 와도 된다는 둥.. 하루에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엄마의 문자메시지는 점점 더 나를 숨 막히게 했고 어떤 날은 죄책감이 들게 했고 어떤 날에는 선을 넘는 말로 화가 치솟게 만들었다.

엄마는 명절 음식을 할 수 있는 건강상태도 물론 아니었고 함께 여행을 떠날 만큼의 건강까지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늘 마음만은 욕심이 많았다.

그 마음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엄마의 마음의 병은 점점 더 극에 달했고 덩달아 주변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명절 그 자체가 스트레스 인 '며느리'라는 역할을 갖고 있는 나인데 친정 엄마까지 나를 달달 볶다니.. 그 모든 억울함과 화는 이윽고 나의 엄마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의 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명절에 한 번쯤은 친정에 먼저 갈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나는 굳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할 용기가 없으니 엄마의 말이 더욱 듣기 거북하고 불편했으리라.


나는 항상 착한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모든 게 평화롭길 바랐다. 그냥 내가 조금 참고 타인에게 맞춰주고 그렇게 아무 갈등 없는 평안한 날들이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평화주의자인 나를 엄마는 자꾸 뒤집어 놓는다.

내 삶에서 엄마만 조용하면 평화롭다.





착한 사람.. 과연 나는 착한 사람일까? 어릴 때부터 현재까지도 늘 착하다 순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지만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며 자기주장이 약한 사람이다.


가뜩이나 멘털 자체가 약한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삶이 만족스럽지가 않고 번아웃이 오면서 나의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했다. 나의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타인에게 맞추는 게 한없이 편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 버벅대기도 하고 저 사람이 나를 형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혼자 눈치를 살폈다. 타인과 함께 밥을 먹게 되면 정말 어떤 메뉴이던 상관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는 게 마음이 훨씬 편했다. 약속 장소를 잡아도 우리 집 근처이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상대방 집 근처에서 만나는 게 내 마음이 편했다.

지금 혼자 있고 싶고 저녁을 먹고 싶지 않지만 상대방이 함께 저녁을 먹자고 청하면 거절을 못해서 만나고 와서는 기가 빨리고 후회하기 일쑤였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맞춰주기 바빴지만 정작 내 마음의 소리는 외면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한없이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졌다.

결국 그토록 가고 싶지 않은 정신건강의학과에 내 발로 찾아갔다.

 

내가 결국 정신과를 가게 되다니.... 어릴 때부터 정신이 아픈 엄마를 보면서 나는 절대 저렇게 아프지 말고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수백 번 생각했다. 그런 내가 역시 엄마를 닮은 걸까...? 역시 나도 정신이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 건가... 인정하기 싫었지만 심해지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느끼면서 덜컥 겁이 났고 결국 병원을 방문했다.

방문하자 우울증 자가진단 테스트지 같은 종이를 받고 솔직하게 체크를 했고 대기하다가 진료 순서가 되어 어떻게 오셨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내가 왜 힘들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몇 마디 떠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고 거기에서도 나는 '내가 말이 길어지면 의사가 싫어하겠지' 라며 혼자 눈치를 보며 말을 하다가 결국 '엄마'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왔다. 그리고는 울컥하면서 눈물이 흘렀다.

결국 뱉었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상처는 '엄마'였다. 상담하면서 조차 들키고 싶지 않은 존재... '나의 엄마'

엄마 이야기를 꺼내고 나니 또 수치심이 몰려왔고 짧게 나의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의사 선생님은 감정 없는 사람처럼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하고 약을 처방해 주었다.


집에 와서 약을 먹었는데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기분이 매우 나빴다. 우울증 약을 먹었는데 왜 더 우울한지 모르겠다. 정신과 약을 먹는 내가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겨우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니 손과 발과 얼굴이 퉁퉁 부었다. 도저히 이 약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마침 둘째 아들이 유치원 졸업식을 하고 바다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해서 여행도 가고 하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우울증에 지고 싶지가 않다.


병원에서 다시 오라고 한 날이 되어 두 번째 방문을 했다. 약을 먹으니 그런 증상이 있어서 그냥 안 먹었다고 얘기를 했고 지금은 여행도 다녀오고 해서 그런지 기분이 꽤 괜찮다고 하니 의사 선생님은 그럼 약을 먹지 말고 급할 때 먹는 약만 처방해 주셨다. 그리고 지난번 자가진단 테스트를 보니 우울증 정도가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다만 매일 마시는 술은 자제하라며...


'우울증 정도가 나쁘지 않다'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우울증에 빠지지 않게 이제 나를 챙겨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