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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 Sep 27. 2024

불행을 쓰는 이유

엄마를 쓰다.

내 인생 최대의 콤플렉스인 평생 남들이 몰랐으면 좋겠고 숨기고만 싶었던 나의 불행한 엄마를 글로 쓴 건 엄마의 전화를 n번째 차단하고 난 직후이다. 그날도 어떠한 이유로 가슴에 불이 붙어 엄마 연락처를 차단해 버리고 이번에야말로 평생 이 차단을 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가슴속 열불을 끄기 위해 엄마의 이야기를 글로 써버렸다.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본 다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쓰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힘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 하루가 멀다 하고 불행이 난무하는 가정환경에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불행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라도 믿어야지 내게 있는 불행을 견딜 수 있었다. 책을 읽을 때 특히 그랬다. 어릴 때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고 학대당하는 제제를 보며 읽기 힘들 만큼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위로가 되었다. 나처럼 아픈 시절을 보내는 다른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 인물이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소설 속의 인물 중에 누군가 정신 질환이 있다면 더욱 그 인물에 애정과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이나 작가의 이야기가 나의 어린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는 약간의 안도감 마저 들었다.



"나만 불행한 게 아니야."




어린 시절부터 정신과 병동은 내게 익숙했다. 엄마가 주기적으로 정신과에 입원했으니 그런 엄마를 틈만 나면 보러 가는 아빠를 따라서 면회 갈 때마다 정신병원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엄마가 입원했던 정신과 병동에는 폐쇄 문이 몇 개 있었다. 그 폐쇄된 문을 통과해서 병실에 들어가면 다인실에 있는 엄마가 제법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반겨주었다. 그곳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분명 다 죽어가는 표정이었겠지.

그곳에는 한눈에 보아도 증상이 심한 사람도 있었고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도 있었고 자식이 교수라는 중년의 여성도 있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 여성도 있었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신병원도 결국 보통의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 봐 우리 엄마가 정신과 환자라는 걸 내 친구라도 보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움츠려 들었다.


우리 엄마가 정신과 환자라는 걸 내가 굳이 말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보통의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평범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수록 사랑받고 자라지 못해서 그런 지 나의 내면에서는 다른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나도 마음이 병들어서 상담이라도 받게 되면 왜 자꾸 어린 시절 얘기를 물어보고 왜 꺼내고 싶지 않은 엄마 얘기를 그렇게 물어보는지.... 내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엄마라는 존재를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더는 회피가 아닌 마주하는 방법을 선택했지만 결론은 엄마와 멀어지는 게 답이 되어버렸다. 사실 엄마의 관점에서는 내가 본인과 멀어져 버려서 힘들겠지만 나는 이미 원가족에서 독립하여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아 나의 가정을 꾸린 사람이다. 그런 나의 또 다른 삶을 인정하지 않고 사정없이 침범하는 엄마를 더는 견딜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한때 내가 이건 정말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 나는 두 집 살림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벅찼던 나에게 엄마는 본인의 모든 일상과 사소한 걱정거리들까지 내게 전하며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주길 바랐기에...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을 침범당해서 나를 망가뜨리게 그냥 두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바로 서서 나를 둘러싼 나의 세계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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