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 은퇴하기로 했다.
회사 분위기가 엉망진창인 듯해도 별다른 동요가 생가지 않는 것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또 당첨되고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의 마음이 이런 걸까? 외길이 아니라는 생각은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 준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여 필사를 하고 독서를 한다. 다 읽은 책은 어김없이 글로 남긴다. 그런 시간이 벌써 3년 차. 이제는 출판사에서 제법 많은 책을 받는 입장이다. 이게 인플루언스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고 돈을 엄청 벌고 그러는 건 또 아니다. 용돈이라도 벌어보려고 만든 블로그는 1년에 한 번씩 정산을 받는 정도니 이렇게 해서는 먹고살 수 없다. 그런데도 마음은 가볍다. 밥벌이를 아직까지 하고 있으니까 조금은 여유롭다. 5년 정도면 나도 책 한 권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도 나이가 들어 은퇴라도 하게 된다면 아내와 둘이 소소하게 살 수 있을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니 조급하지도 않다. 역시 인생 전환은 느긋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지만 주어진 일은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 일을 받지 않는 건 상관없지만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건 성격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바빠 보여야 하고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 한다. 아는 사람들이 있어도 꽤 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혼자서 먹는 밥도 상관없다. 빠르게 먹고 사라져야 하니까. 쓸쓸하고 씁쓸한 마음은 없다. 스스로 고립되길 원하고 있으니까.
여기는 언제까지 다녀야 할까?
가끔 혼자 생각해 본다. 지금 당장 사직서를 던지고 프리랜서를 해도 상관없다. 이미 회사를 나간 동료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고 차근차근 일을 늘려나가면 돼서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빚을 지지 않는 것. 그것만은 잘 지키고 있다. 그래도 지금 할 필요는 없다.
'쓰나미가 발끝에 닿지 않았으니까'
회사는 소용돌이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씩 돌풍이 몰아치긴 하지만 스쳐가는 돌풍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본체가 내 발끝에 닿는 순간이 회사를 떠나게 되는 날이 되지 않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 20년 가까이를 다닌 회사. 쉽게 나가기엔 조금 아쉽다. 정을 뗀다고 하는데도 추억은 나를 우유부단하게 만든다.
사실 마흔에 은퇴를 준비하기로 인생 설계를 했었는데 '한 해만 더' 하다가 벌써 이 나이가 되었다. 팀장직을 내려놓고서야 미친 듯이 읽었던 책. 이제 다시 팀장이 되어 그때만큼 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은퇴 준비라고 생각하며 부단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나는 단순히 회사를 떠나고 싶은 게 아니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거다.
완벽한 탈출.
100세 시대. 적어도 세 번의 커리어 전환이 필요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두 번째 커리어를 펼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조한 마음에 부산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꾸준히 하기로 했다. 회사에서의 인정도 가지고 있을 때 유지해야 하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상황은 최소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일로 지금의 반 정도의 벌이가 되었을 때 움직여도 괜찮다. 중년의 도전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부장님, 저도 6월까지만 다니기로 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14년을 함께 일한 녀석이 벤치에 앉아 햇빛을 씌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불쑥 던진 말은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래, 좋은데 있음 가야지"라는 쿨한 대답에 비해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조금 쓸쓸해졌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아쉬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은 복잡하다.
"정말? 부럽다. 그긴 돈 많이 준데요?"
"여기보다 근무 조건도 좋은데 돈도 많이 주더라고"
"우와, 팀장님이 잡고 그러지 않았어요?"
"우리 팀장님? 완전 난리지"
옆에 있던 과장 하나가 농담처럼 물어본다. 원래 활달한 녀석이라 무거워진 분위기를 견지지 못하는 듯이 업된 분위기를 만든다. 지금의 회사 분위기로는 잡을만한 구실도 명분도 없으니까, 그 팀장도 답답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는 게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닌 걸 안다. 특히 오래 다닌 사람들의 경우 더 그렇다.
"뭐,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곳에서도 한 번 일해보고 싶어서요"
"그래, 그건 좋은 거지"
퇴사 이유를 둘러대는 녀석에게 직구를 날렸다. 다들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이유가 뭐가 되었던 떠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응원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불과 하루 전이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저 오늘 마지막 근무라서 인사드리려고요"
"앗, 나에게까지 인사해 주는 거예요? 좋은 곳으로 가죠? 어딜 가나 잘할 거예요"
"그동안 빼빼로데이마다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 그거야.."
"그럼, 안녕히 계세요"
"충전 잘하시고 앞으로도 잘 해내시길 바랄게요"
"넵, 감사합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일하던 대리가 사내 메신저로 톡을 보내왔다. 대화를 나눌 일도 별로 없었던 조용한 직원이었다. 매년 아내가 준 빼빼로를 다 같이 나눠 먹었던 게 기억에 남았나 보다. 생각지도 못한 퇴사였기에 당황스럽기는 했다. 묵묵히 일하던 친구들의 사직서는 느닷없이 닥친다.
'부장님은 준비 안 하세요?'
불과 몇 달 전이었던가. 인사처럼 받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싶기에 그냥 다닐 수 있을 만큼 다니기로 했다. "다 나가는 거 보고"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커리어를 만드는 데 20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때인 듯했다. 그리고 다시 할 일은 재미있으면 했다. 그리고 불안하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의 일도 너무 좋다. 심지어 재밌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여러 이유로 힘든 점이 있다. 그래서 혼자서 홀가분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가족과의 시간도 많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밝히 빛나는 모니터와 마주하고 글을 쓰는 시간이 좋았다.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인 듯했다. 글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는 수학, 과학이 좋았다(지금도). 공돌이가 글 쓰는 걸 좋아한다면 다들 놀란다. 하지만 코딩도 어떻게 보면 글쓰기다. (그런 식이면) 20년 넘게 글을 쓴 건데, 내 글은 여전히 고만고만하다. 그래도 서점 매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책을 써보고 싶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에 책 보다 좋은 게 없는 것 같다.
공부한답시고 전문서적만 주야장천 읽던 시절의 나는 소설은 돈도 안된다며 멀리 했다. 언제나 '기술 최고'를 외치며 그렇게 새로운 기술들만 파고 다녔다. 팀장이 되고서야 리더십 책을 찾아 읽었고 가끔 심리책을 읽었다. 자신의 마음 다르스리기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 마음까지 헤아려야 하니 바빴다. 그렇게 허덕이며 살다 보니 이제야 글 쓴답시고 문학을 읽는다.
멈출 용기가 없었던 거지.
무협지, 판타지를 읽던 나도 있었다. 그런 소소한 행복을 잘 살아보겠다는 목표 아래 잠시 치워뒀던 것 같다. 이제는 다시 편히 즐길 수 있도록 해야겠다. 여전히 서먹서먹하기는 하지만 금세 친해질 거다. 꽤나 오랜 친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