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퇴근길 버스는 무려 30분 동안이나 오지 않았다. 배차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이곳의 대중교통은 한국처럼 빠르지도, 정확하지도 않았다. 버스가 오지 않을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정류장에 모여들었다. 어느새 누가 먼저 왔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결국 저 멀리 다가오는 버스가 보였지만 멀리서도 그 안에 사람이 가득함을 알 수 있었다. 정류장에는 살짝 줄처럼 보이게 사람들이 서 있었지만 정확히 줄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그 흐릿한 줄은 깨지고 사람들이 버스 앞으로 우르르 모일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경기도민이 아니던가! 정류장 바로 앞 사거리의 신호 상황과 버스 앞에 있는 승용차 대수 등을 고려해 버스가 어디쯤에 멈춰서 문을 열 것인지를 계산 후 바로 그 위치에 서 있었고 다행히 버스에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그 정류장에서 모든 사람이 버스를 탈 수 없었음은 당연하고 그다음 정류장에서도, 그다음의 다음 정류장에서도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끔 정류장에서 한 두 명이 내리기 위해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사실 원칙적으로 문 앞, 바닥에 표시된 선 밖으로 사람이 서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몇몇의 승객이 내리고 난 후에도 버스 기사 아저씨는 몇 번이나 새로운 승객의 탑승을 거부했다.
다들 불만을 표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기사 아저씨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버스는 이미 충분히 만원이었고 아저씨는 버스 양 옆의 사이드 미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여자가 탑승을 거부당하며 생겼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더니 자신이 Brown (갈색 피부를 가진 중동 지역 사람들) 이기 때문에 기사가 자신의 탑승을 거부했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영어로 통해 여기서 태어났거나 아주 어릴 때 이민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나는 그제야 버스 운전을 하던 아저씨가 백인임을 깨달았다.
정작 함께 탑승을 거부당한 다른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버스 창문 너머 안에까지 다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TTC (토론토 대중교통 회사)에 항의를 하겠다느니 문제제기를 하겠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저렇게 자신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바로바로 표현할 수 있는 거 자체가 차별 대우를 받은 게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불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 간혹 들었는데 알고 보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불친절했다. 캐나다 특히 토론토 같은 이런 대도시는 생각보다 동양인과 인도인의 비율이 크기 때문에 만약 정말 인종차별주의자라면 이곳에서 살기가 힘들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 만약 정말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어떠한 종류의 차별을 받았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괜히 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한 번은 어떤 모임에서 유독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나랑 닮은 여자한테 까인 적이 있나?', '지 주제에 죽었다 깨어나도 나 같은 여자 못 만날 것 같으니까 괜히 심통이지.' 하며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생각해 버렸다. 그러자 크게 마음 쓰지 않고 넘길 수 있었다. 한 때 인터넷에 "그래. 귀여운 내가 참아야지..."라는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때 제대로 배운 것 같다.
우연히 여행 중에 미국에서 전화 응대 업무를 하고 있는 한국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일을 하다 보면 꽤 많은 흑인들과 인도 사람들의 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10년 이상 미국식 발음으로 된 영어만 배운 우리는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악센트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열심히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에 왔는데 사람들이 전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면 못 알아들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지방 사투리는 한국인인 나도 심각하게 못 알아듣는다.) 아무튼 그래서 '미안한데 다시 말해줄래?', '천천히 말해줄래?'라고 물으면 꽤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며 '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냐'등의 항의를 잔뜩 퍼붓고는 매니저를 바꿔달라 한다고 한다. '내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그렇다. 미안하다'라고 해도 이미 그들은 잔뜩 화가 났기 때문에 매니저가 직접 통화하고 설명해야 상황이 종료된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나는 탑승을 거부당하자 '이건 명백한 차별'이라며 부르짖던 그 여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소수인종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야 했기에 차별이 아닌 상황마저 차별받았다고 생각하며, 그런 자격지심이 생기게 된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또한 본인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를 당하며 사는지를 문제 삼으면서 정작 그들 또한 다른 인종의 사람들, 본인들보다 더 나중에 이 땅에 온 사람들, 영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 여기에서 살다 보면 차별까진 아니더라도 가만히 있었더니 정말 '가마니'인 줄 아는 상황이 많이 생긴다. 항의해야 할 일도 많고, 내가 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호구가 되는 상황도 많았고 그렇게 나는 점점 쌈닭이 되어갔지만 요즘은 귀찮아서 그냥 넘어간다. 굳이 이런 일에 마음 쓰고 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님 이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그다지 신경을 안 쓰게 된 것인지 '그러거나 말거나'하고 무시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냥 마음을 비우자. 그게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