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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이스 Feb 27. 2019

13. 내 이름은...

지구 반대편으로

언젠가 정말 놀란 일이 있었다. 스타벅스에 가서 친구 음료까지 두 잔을 주문했다. 주문 전에 음료와 음료에 들어가는 우유에 관한 질문을 하고 주문을 한 후, 컵에 뭐라고 적는 직원을 보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문득 ‘왜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타벅스는 주문을 받을 때 고객의 이름을 묻고, 음료가 나오면 그 고객의 이름을 불러준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잠시 후, 그레이스의 음료가 나왔단다. 나는 당연히 내가 시킨 메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내가 주문한 다른 음료도 나오고 내 이름은 한번 더 불려졌다.

‘뭐지?’ 순서도 그렇고 시킨 메뉴도 그렇고 누가 봐도 내가 시킨 커피가 맞았다. 그렇게 바쁜 매장도 아니었다.

내가 망설이자 친구가 왜 그러냐 물었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없은데 얘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커피를 주느냐고 되물었다. 보통 스타벅스 카드로 결제하고 그 카드에 내 영문 이름이 쓰여 있기 때문에 간혹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이름을 아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엔 분명 현찰로 계산했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 매장을 나오며 한번 더, 아니 몇 번을 더 되뇌었다. 나는 내 입으로 ‘그레이스’라는 발음을 한 적이 없다고... 친구는 직원이 내 이름을 물었고 내가 이름을 말한 후 지폐를 꺼내 계산했다고 말해주었다. 뒤에서 지켜보며 ‘여기 스타벅스는 이름을 물어보는구나’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명히 들었다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서도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그레이스라고 대답하는 나의 영문 이름은 당연히 내 진짜 이름이 아니다. 나에겐 부모님이 지어주신 평범하기 짝이 없고 어릴 때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름이 있다. 한때 진지하게 개명을 생각할 정도로 내 이름을 싫어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25년 넘게 불린 이름을 참 빨리도 잊었다. 나는 이제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나의 한글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이 너무 낯설다. 심지어 이젠 한국에서 만난 한국인들도 나를 그레이스라고 부른다. 가끔은 한국인 친구들 중에서도 내 한국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한 때, 영어 이름을 바꿀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레이스라는 이름은 너무 오래된 이름으로 주로 할머니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들 종교적인 의미에서 영어 이름을 정한 거라 짐작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계 이민자들 중에 그레이스 리가 정말 많은데 캐나다에 살고 있는 '그레이스 리' 들을 찾아서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다큐멘터리까지 있다고 한다. 흔한 본명이 싫어서 영어 이름을 쓰는데 그 마저도 아시안 여자들에게 흔한 이름이라니. 보통은 내 한국 이름인 '은혜'가 영어로 Grace라서 쉽게 영어 이름을 정한 거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다. 내가 나의 영문 이름을 그레이스로 정한 이유는 단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때문이다. 그 딱 한 장의 앨범 제목이 바로 'Grace'이다.


무튼 그 스타벅스 사건 이후로 영어 이름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다신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무의식 중에도 누가 물어보면 자연스럽게 그레이스라고 답할 정도로 이 이름이 익숙하니까. 비록 조금 촌스럽고, 너무 성스러운 이름이라 할지라도 이제 바꾸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안녕하세요! 그레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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