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넌 뭐 하는데 그렇게 바쁘냐?"
어느 날 갑자기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바빠? 내가 바빴던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친구를 못 본 지 몇 달이 되었다. 그제야 내가 요즘 뭐 하고 사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뭐 하느라 바빴지? 생각해 보면 딱히 바쁘지는 않았는데, 뭐 하느라 친구들도 몇 달 동안 못 만나고 살았을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두 군데에 일자리를 구해서 일하면서도 거의 모든 모임과 파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심지어 둘 중 한 곳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출퇴근에 시간이 꽤 들었는데도 여기저기 열심히 다녔다. 친구들 사이에선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내가 모르는 애들도 나의 존재를 알 정도였다. 하루 종일 일하고 파티에 가서 밤을 새우고 놀다가 집에 가서 잠깐 자고 다시 출근한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평일 8시부터 5시까지만 일 하는데도 왜 이렇게 바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5년 전의 내 생활과 비교해 보면 더 여가시간이 많은데 도대체 난 여가시간을 뭘 하면서 보내는 걸까?
우선 평일엔 아침에 일어나 부리나케 출근을 하고, 퇴근하면 저녁을 만든다. 가끔 퇴근길에 장을 볼 때도 있다. 저녁을 열심히 만들어서 먹고, 설거지하고 정리하면 벌써 8시다. 그 전날 만든 걸 대충 데워먹는다 해도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다음날 회사에서 먹을 도시락을 싸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 귀찮아서 도시락을 싸지 않은 날엔 근처에서 햄버거나 볶음밥 같은 간단한 음식을 사 먹는데 아무리 저렴한 걸 찾아먹어도 한국 돈으로 만 오천 원이 조금 넘다 보니 꽤 부담이 된다.
8시쯤 모든 걸 정리하고 내 방으로 들어오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피곤하다. 하루 종일 쌓였던 긴장과 스트레스가 내 방문을 닫는 순간 마치 '나 여기 있었어!' 하듯이 내 온몸을 휘어 감고 나를 조종하는 것만 같다. 결국 무거운 몸을 이끌고 씻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는 스마트폰과 한 몸이 되어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다. 도파민이 터지는 하루 중 가장 짜릿한(?) 시간이다. 왜 이 시간이 그렇게 금방 지나가는지.
주말엔 더 할 일이 많다. 미뤘던 빨래와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세탁실까지 가서 빨래를 넣고, 다시 가서 빨래를 가져와 널고, 마른빨래는 개어서 서랍에 넣기까지가 여간 수고스럽지 않다. 게다가 나는 집 전체 계약자로서 내 방뿐만 아니라 주방, 화장실까지 청소를 해야 하고, 쓰레기도 버려야 한다. 근데 사실 이 정도는 독립을 하고 자취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양의 집안일일 것이다.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혼자 사는 것에 대한 편함과 자유로움을 얻은 대신 그만큼의 책임감과 의무를 얻은 것이다.
여기에 나는 혼자 외국에서 더욱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고 있다. 우선 현지 은행들이 실수가 많고 이곳은 통장이 따로 없기 때문에 수시로 내역을 확인하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은행에 가서 따져야 한다. 인터넷도 한국처럼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끔씩 통신사에 전화해서 '인터넷이 느리네, 안되네!'를 해줘야 한다. 게다가 나는 2명의 하우스 메이트와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이사를 나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약속시간을 정하고 집을 보여주고, 새로 계약을 하는 일은 너무나도 귀찮지만 미룰 수 없는 일이기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들어올 때까지, 아니 이사를 들어오고 나서도 이것저것 설명해 주며 그 친구가 우리 집에 적응할 때까지 확실하게 일처리를 끝내야 한다. 여기에 전체 계약자로서 매달 월세와 고지서를 납부하는 일은 덤.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 있고 동료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생활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생활을 철저하게 나 혼자서 한다. 그래서 외로운가? 어쩌면? 하지만 이 또한 내가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렇게 살기로 결정했으니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어차피 혼자서도 참 잘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