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토론토에서 사는 동안 이 도시의 단점 몇 개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찬 적이 자주 있었는데 주요 핵심은 '느리다'라는 것이었다. 나라가 워낙 크니 택배가 늦고 인터넷이 느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지하철과 버스가 느리고, 관공서의 일처리가 느리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해결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성격이 급하기도 하지만 행동 자체가 빠릿빠릿한 사람인 나로서는 '다를 수 있지' 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참기 힘든 부분이었다. 친구가 다쳐 밤에 응급실을 갔을 때, 다음 날 아침까지 의사를 볼 수 없는 황당한 일을 겪은 후 진지하게 한국행을 고민했다. 캐나다는 의료비가 무료라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항상 "공짜면 뭐 해! 느려 터졌는데! 우리나라는 돈을 약간 내지만 비싸지 않고 대신 빠르고 정확한 치료를 받을 수 있어!"라고 자랑하곤 했다. '영국은 아플 걸 미리 알고 예약해야 한다더라', '미국은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한 번 다치면 빚쟁이 된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나마 캐나다가 낫지' 하고 살았다.
졸업 후 본사는 미국이지만 캐나다 지사가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밴쿠버에 있는 직원들과 업무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동료들은 '밴쿠버 애들은 원래 느려 터졌어.'라고 나를 위로해줬고 나 역시 동부보다 서부에 느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직접 느끼며 서부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더 생겼다. 이런 내가 갑자기 밴쿠버행을 결정한 것에 내 주변 사람들은 꽤 놀랐는데 어차피 집과 일을 다시 구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이럴 바엔 다른 도시도 경험해 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기대감과 두려움을 딱 절반씩 가지고 캐나다 서부인 밴쿠버로 이주를 했다.
토론토에서 덜 치열하게, 덜 바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여유가 넘친다'는 밴쿠버로 갔지만 그 도시의 분위기와 그곳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여유라는 것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밴쿠버는 토론토보다 더 느리고 여유가 있는 도시였으나 나는 그런 삶을 살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밴쿠버에서 만난 한국인 동생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도시를 사랑했지만 바쁘고 빠른 게 좋은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한국의 서울만큼 사람이 많고 복잡한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젊으니 나이에 맞게 충분히 빡세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체력과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만큼 속도를 줄이며 여유 있게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사실 여유는 두둑한 지갑에서 온다는 말도 있는데 어쩌면 내 지갑이 두둑하지 않아서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그저 생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다 해볼 계획이 있기 때문에 바쁘게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편이 몸은 힘들더라도 마음은 훨씬 편하다. 몸이 바쁘지 않으면 머리가 바빠 걱정이 많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딱 내 얘기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엄청 부지런하게 바쁘게 사는 사람 같이 들리지만 사실 나는 이미 체력 고갈로 인해 자주 피곤하고 자주 아프다. 엄청 게으른 편이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일명 '집순이'다. 친구네서 일주일 동안 신세를 졌을 때, 하루 종일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내 모습에 친구가 경악한 적도 있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가끔 자기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말하곤 할 정도로 나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평균보다도 느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 게으른 내가 바뀔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분위기의 도시가 좋은걸 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바쁘고 정신없이, 빠르게 살고 싶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