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으로
컬리지를 졸업하고 work permit, 즉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1년 8개월을 일했다.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했던 라멘집 사장님의 추천으로 유학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학교를 마치자마자 공백기 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다행이었고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한 유학원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처음에는 어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는 내가 토론토에 있는 많은 어학원과 프로그램을 숙지하고 학생에게 설명해줘야 하는 게 힘들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일 외적인 부분들이 스트레스를 주기 시작했다.
직장을 옮겨 캐네디언들과 일하게 되었지만 스트레스는 마찬가지 아니 더 커졌다. 유학원 때와는 반대로 초반에는 일 외적인 부분들, 즉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일과 내 영어실력이 탄로 날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것이 너무 큰 스트레스였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니 만큼 혼자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여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긴 한데 나 스스로 '나는 외국인이다'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던 걸까 싶다.
나는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 이제는 얼굴만 봐도 통하는 오래된 친구들, 내가 살았던 동네들, 익숙했던 그 모든 것들을 떠나 지구 반대편에 와 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살고 있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뿐일 때마다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나와 비슷한 상황의 유학생들과 수다 떨며 우리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머릿속에 '맛있다'와 '배부르다'라는 생각만 남도록 맛있는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 것. 마지막으로 셋째는 글을 쓰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얼마 전에 '글쓰기 명상'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나에겐 글을 쓰는 것이 즉 무슨 내용을 쓸까 구상하고,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고, 맞춤법을 신경 쓰고 하는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힐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게 힘들어졌다. 작은 일에도 분노하고 생각이 멈췄다. 나는 욕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이때 당시에는 꽤 자주 욕을 했다는 룸메이트의 증언도 있었다. 남들은 외국에서 일을 하면 한국에서보다 돈을 더 잘 벌 것이라 막연하게 추측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한 달 방 값만 거의 100만 원에 핸드폰 요금과 교통비, 식비와 유흥비를 포함하면 매달 200만 원은 기본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는 식의 한국 농담이 보기 싫어졌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 초년생들이나 학자금 대출이 있는 사람들이 아닌데 정말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면 그건 본인의 소비습관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숨만 쉬어도 백만원이 사라지는 곳에서 조금이라도 덜 쓰기 위해 아직도 악착같이 노력한다.
이때 즈음 '비즈니스를 전공한 유학생들 절반 이상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다더라', '누구는 학교를 졸업하고 1년째 일을 구하고 있다더라', '아무개는 졸업 후 일을 하고 있지만 영주권 신청 자격이 안된다더라', '또 누구는 일하는 가게에서 영주권 지원을 받기 위해 매일 12시간씩 주 6일을 일한다더라' 같은 말들이 내 귀로 들어오고 또다시 내 입으로 나갔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 줄 알았는데 실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것 자체가 다 내 안에 스트레스로 남았다. 내가 그들보다 더 나은 상황인 것 같지도 않았다. 캐나다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나는 내 실제 나이와 한국에서의 경력은 철저하게 무시된 채 가장 낮은 직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곳에선 엔트리 레벨(Entry level)이라고 부른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한국에서 최소한 '대리' 타이틀은 달았고 연봉도 기존보다 올랐을 나이였는데 나는 거의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심지어 팁이 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식당에서 서빙을 할 때보다 더 적게 벌었다. '내가 워홀러일 때도 이것보단 많이 벌었는데 여기서 학교까지 나왔는데 왜 덜 벌고 모으는 돈이 한 푼도 없는가!' 하는 자문을 매일 같이 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건 영주권을 위한 것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영주권을 딸 때까지만 참자고, 이 시기는 절대 2년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영주권을 따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영주권이 있다고 갑자기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게 되는 것도, 내가 외국인이 아닌 것도, 갑자기 통장에 넉넉한 잔고가 생기는 것도, 한국에서의 경력 5년이 인정되어 좋은 회사에 경력직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되어 초대장을 받고도 서류를 제출하고, 서류심사가 끝나 증명사진을 제출하고, 다시 최종 컨펌 레터를 받고, 국경에서 그 레터를 내고 진짜 캐나다 영주권자가 되기까지 거진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일을 그만두고, 동남아 한 달 배낭여행을 갔고, 모스크바 횡단 열차를 탔다. 러시아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유럽 여행을 전부 최소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토론토에서 함께 살았던 자매 같은 룸메 언니, 동생과 제주도 여행도 가고 가족들과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밴쿠버라는 새로운 도시에서 몇 달 동안 지내며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 나는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