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있었던 황당한 일부터 생각을 정리하고 갈게. 집단 프로그램인데 이 오미크론 시국에 마스크를 안 쓰겠다고 고집하던 사람들. 내가 주인장인데 나보고 나가라고 화내고 짜증 내던 사람. 지금 생각해도 웃겨. 웃긴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사람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야. 강력히 주장하고 싶은 것 같긴 한데 뭔가 논리가 한참 떨어지고 감정만 앞서 있는 느낌.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자기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했지. 그 사람이 말은 안 했지만 추측컨대 정부의 현 방역지침은 무용지물이고 사기라서 자기는 따르지 않겠다는 것 같았어. 그걸 백번 이해한다고 쳐도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나갈 일이지 왜 나한테 나가라고 하는지, 참 희한한 사람이었지.
이게 부부편지에 왜 등장하는가. 자기도 알겠지만, 그 희한한 사람을 데리고 온 참가자도 뭔가 범상치 않았거든. 참가비도 선불인데, 와서 현장 지불 하겠다고 하고, 난데없이 예약도 안 한 사람들을 대동해서 함께 참가하겠다고 하고. 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다른 사람을 데려와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데려갈 거라고 말하고. 뭔가 이상해서 자기한테 몇 번 물어봤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자기는 다른 모임을 통해서 몇 번이고 만났던 사람이니까. 그때 내가 자기한테 들었던 답은 대강 ‘나쁜 사람은 아니고 지킬 건 지킬 거다’였어. 그런데 맙소사. 지키긴 뭘 지켜.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실감했어. 우리 아내는 도대체 왜 이런 감이 떨어지는 걸까. 대인관계도 나보다 잘하는 것 같고, 관계에 있어서 나보다 센스도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사람 보는 눈은 그것과는 무관한 걸까. 그래도 직접 몇 번이나 만났던 사람이니까 나의 막연한 감보다 정확한 정보를 나에게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 사람 이상해!’ 한 마디 해 줬으면 내 감에 확신이 들었을 텐데. 물론 자기한테 묻기 전에 내 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대응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건 내 숙제. 앞으로 나는 나를 좀 더 신뢰하고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는 내 감대로 움직이더라도 서운해하지 말길!
다시 당신 얘기로 돌아와서, 자기는 왜 그런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면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대인관계 능력이라는 건 남과 나의 장단을 잘 맞추는 거라고 생각해. 남의 장단만 맞춰도 안 되고, 내 장단만 강요해도 안 되지. 그렇게 보면 자기는 남의 장단은 잘 맞추는 것 같아. 자기 장단을 놓아가면서까지 말이지. 자기 장단의 그루브를 타면서 남의 장단도 맞출 줄 알아야 할 텐데. 자기를 다 내주면 아무리 남의 장단이 흥에 겨워도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 안에 내가 없는데. 그래서 가끔 걱정된단 말이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언제고 남의 술수에 빨려 들어가지는 않을까, 이 험한 세상에 말이지. 나의 지극한 마음이 느껴지시는지!
그에 비해 나는 남의 장단은 잘 못 맞추지. 남의 장단을 알 때조차 잘 맞추려고 하지 않기도 하고. 나는 내 장단과 어우러지지 않으면 도무지 배기질 못하니까. 이런 우리 두 사람이 만났으니 일면 합이 잘 맞는 것도 같고 전혀 안 맞는 것도 같아. 나는 내 장단에 맞추고 자기도 내 장단에 맞추고. 얼쑤! 우리 사이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 같은데, 아닌가? 워~ 또 강요한다고 화내지 마. 반은 농담이야.
우리의 문제, 정확히는 자기를 향한 내 문제가 거기서 오는 것 같아. 자기에 대한 나의 노심초사. 남 눈치 보느라 자기 장단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걱정되는 마음.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하는 자기를 바라볼 때면 깊은 한숨을 쉬게 되지. 물가에서 놀면서 뭣도 모르고 물속으로 계속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심정. 아무리 봐도 일이 풀릴 모양새가 아닌데 본인은 까마득히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 아, 적다 보니 내 마음이 좀 과하긴 해. 다 큰 성인을 두고 더구나 부인을 두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그러니까 이게 내 문제인 것은 확실하지. 내가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자기에 대한 기대가 좀 과한 것 같아. (다만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부인께서도 이제 눈을 뜨셨으면, 강력히 소망 하나이다.)
자기 장단을 존중해 줘야 자기 장단이 살아날 텐데 자꾸 조바심이 들어 간섭하게 되네. 이게 또 다른 두려움의 정체야. 지난번 편지에도 썼듯이 이제 두려움과 분연히 결별하려고 하니 이제 자기를 향한 나의 서툰 기대도 내려놓을게. 그럴 시간에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내 삶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싶다. 당신을 온전히 믿고 싶다. 그래서 노력하던 것 중 하나가 자기를 ‘사랑둥이’라고 부르던 거야. 자기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바라보고 그것에 더 집중하려는 거야. 이런 속마음이 있었는 줄은 몰랐지? 요새 좀 뜸했는데 다시 불러줄게. 지금 바로. 사랑둥이야! 이게 버릇이 아직 안 돼서 말이지. 자기 말대로 입술이 간질간질하면서 아직은 약간 억지로 해야 한단 말이야. 나의 갸륵한 노력을 봐주길 바라. 자기 최면이라도 걸어야겠어.
내가 선택한 이 사람이 사랑둥이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사랑둥이겠는가! 나는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면 내 주위 사람도 다 사랑둥이가 되어야지. 우리 가족은 모두 사랑둥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사랑둥이다! 나는 온 인류를 사랑한다!
흠, 잠시 간디 같은 마음에 젖어 보았네. 내가 비록 좀스러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이런 하해와 같은 마음을 품을 때도 있다는 걸 잊지 마. 당신 남편이 이런 사람이야. 오늘은 사랑둥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시간 내서 생각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