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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힘 Oct 22. 2023

4 남편_ 엊그제가 결혼기념일이었지?

선물은 '두려움 없이 살겠습니다.'


안녕 여보. 엊그제가 결혼기념일이었지? 우리 서로 아무도 특별히 챙기지는 않았지만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결혼 10주년이라니. 참 희한하다. 시간이 빨라도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아. 기억을 떠올려 보면 결혼식 당일의 소란스러움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야. 뭔 정신으로 결혼을 했나 몰라. 먼저 결혼했던 아는 형이 그러더라고.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라고 하면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라고 하면 저쪽으로 가고 그랬더니 어느새 신혼여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나.

      

지금 와서 떠올려 보면 10년이 그렇게 지나간 것 같아. 직장에서 사투를 벌이다 보니 2년 훅 가고, 이직하고 또 적응하느라 1년 훅 가고, 아이 태어나고 애들 보느라 또 몇 년 훅 가고. 물론 아이들은 주로 자기가 봤지만. 어쨌든 눈 떠보니 결혼 10년이 지나간 것 같아. 앞으로 더 빨리 시간이 흐를 걸 생각하니 무섭기까지 하다. 지금 같은 시간 감각이면 좀 있으면 애들 대학 보낼 때가 다가올 것 같은데. 어쩌지?


문득 말만 많은 내가 두려워지기도 해. 어디서 주워들은 것 많아서 말만 많고, 실행하지 못하느라 걱정과 두려움으로 범벅이 되어서 사는 나의 꼴이란. 김장철은 일 년에 한 번만 찾아오는데 나는 걱정과 두려움을 왜 사시사철 담그고 사는 건지. 김치는 잘 익은 걸 더 좋아하는데 걱정과 두려움은 매번 새로 익혀서 겉절이로 먹는 건지. 이제 걱정과 두려움으로 버무린 김치는 그만 담글 때도 됐는데 왜 자꾸 담그는 기술만 높아가는지. 이제 좀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제도 잔소리했지. 사실 잔소리는 거의 매일 하고 있지. 그 잔소리의 발로가 걱정과 두려움이니 제발 그만 걱정하고 그만 두려워하고 싶어. 나도 조절하고 싶은데 이게 잘 안 되네. 이렇게 쓰다 보니 자기의 소비 성향이라든가 가구 재배치 취향이 아무리 말해도 바뀌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부터 잘해야지. 내 걱정이랑 두려움 등 감정의 패턴부터 바꿔야겠어. 그때는 자기한테 당당하게 요구할 테니 준비하고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족을 꾸리면서 이런 면에 대해서 고민이 늘 들어. 나의 감정 패턴을 닮아가는 아이들, 나의 감정 표현을 닮아가는 아이들. 교육받은 대로 이상적인 부모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것 같고. 다만 나의 걱정과 두려움을 전염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우리가 부모가 되기 위해 경제적인 부분 등 많은 준비를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미흡했던 것은 내 심리적 문제를 더 많이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직업상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남의 마음을 돌보고 있는데도 나의 문제 있어서는 왜 그리도 자유롭기 어려운 걸까. 가끔 정말 많이 좋아지는 내담자들을 보면서 생각이 들어. 나는 그렇게 나아지고 있는 걸까? 나아가고 있는 걸까?

      

이참에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돌아본다. 가끔 느끼는 큰 답답함. 이대로는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대로는 만날 거기서 거기인 채로 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벤츠 타고 싶다는 아내의 소원을 절대 들어줄 수 없게 되리라는 두려움. 월급 노예로 성실한 무기징역수로 살다가 결국 삶이란 이런 것이라며 회한이나 남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너무 친하게 지냈지만, 이젠 그만 절교하고 싶은 두려움.


사실 어린 시절 꿈 많던 내 삶을 멈추어 세운 것도 이 녀석, 두려움이야. 삶을 가로막는 건 다 두려움이니까. 두려움. 이젠 그만 이 친구랑 결별하고 싶다. 이 친구랑 동거를 너무 오래 해서 자기랑 동거가 쉽지 않은 것 같아. 자꾸 이 친구가 자기랑 같이 있자고 꼬시는데 그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 좀처럼 이 친구에게서 벗어나는 게 쉽지 않네. 자기가 나를 더 강렬하게 유혹해 주길 바라. 오늘 밤 당장. 유혹당하지 않은 날들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이러다가 영영 두려움의 포로가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의 노예가 된 남편과 살고 싶지 않다면 오늘은 꼭 유혹해 주길 바라. 알았지?


잠깐 진심 어린 농담을 했는데 말이지. 두려움은 그만큼 나에게 영향력이 큰 것 같아. 자기한테 온갖 귀중한 조언을 겸해서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것도 다 이 두려움 때문이야. 두려움에 새가슴이 되면서 자기를 몰아세우는 거지. 어서 빨리 이것저것 좀 하라고. 그래야 우리가 번성할 수 있지 않겠냐고. 사실 번성보다도 생존에 가깝지만.


글로 쓰다 보니 쑥스럽네. 나이가 얼마나 더 먹어야 이제 사는 게 두렵지 않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지. 가장의 무게가 하나도 무겁지 않다고 할 수 있을지. 내가 선택한 삶이니 어떤 장애물이 나를 막아서도 두렵지 않다고 말할 시점은……. 그냥 지금 당장이라고 하자. 이런 중요한 일을 맨날 유보하며 살 수는 없어. 결혼 10주년, 결혼기념일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고 아무 정신도 없었지만, 선물로 대신 이렇게 할게. ‘앞으로는 두려움 없이 살겠습니다!’ 나도 당신도 우리 가족 모두 두려움 없이 세상 속에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살아보자. 우리 가끔 듣는 그 노래처럼. ‘너의 어깨가 부서져라, 부딪쳐야 해. 필요한 건 로켓 펀치!’ 해보자, 까짓 거. 한 번 사는 인생, 우리 부인 벤츠 타게 해 보자. 나도 성실한 무기징역수에서 탈옥해서 자유인으로 광명도 찾고. 우리 아이들 신나고 재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집안 분위기를 가꾸어 보자! 내가 먼저 노력할게!


음,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는군. 그럼 오늘부터 분연히 두려움과 결별하는 삶을 살아볼 테니 두려움과 헤어지기 위해 매일 밤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유혹해 주기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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