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방관아빠 무스 May 18. 2023

나의 첫 선생님

아침 동산에서(35)

(사진-조리맘 네이버 블로그)


   내 기억에 남은 첫 선생님은 바로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세대차이 나게 왜 '국민학교'라는 점을 강조하느냐면 그때는 지금과 달라도 너~~~무 다른 세대, 아니,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아직 완전한 대한민국이라기보단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시대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시대에 지어진 것들이었고 사회 분위기나 관습, 사고방식이 일제시대의 그것들과 닮아있었다.


   선생님 얘기를 하면서 왜 뜬금없이 사회분위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이 글을 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그때 사회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교실에 칠판 위에는 중앙(중앙이란 말도 되게 일제스럽다~)에 태극기, 좌우엔 국민교육헌장(요즘 애들은 이런 거 알랑가 몰라, 하지만 라떼는 이걸 달달 외웠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과 그것을 지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떡 하니 걸려있었다. 지금이야 '박통'이라는 애칭(?)으로 많이 불리지만 그때는 그런 애칭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어디서 쪼인트 까일라고~ㅠㅠ)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느낀 그는 양복 입은 일국의 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입에서 한마디로 결정되었으며 저녁 9시만 되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TV를 통해 모든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던 나라, 아이들마저도 고무줄 뛰기를 하면서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을 노래 불렀던 나라, 이 사람이 이나라의 왕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한마디로 그는 곧 국가였다. 월요일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저녁 6시가 되면 어디서 뭘 하고 있든 간에 멈추고 국기 강하식을 보면서 저녁놀이 붉게 물드는 그때 내려오는 태극기를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자의든, 타의든 비장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 같았던, 그런 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 국민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바로 그 박정희 대통령과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는 아마도 그때 대통령 이하 모든 지식인(모든 공무원과 사무직, 그리고 교육계 종사자)들이 거의 비슷한 헤어스타일에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하게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거기다 초등학교 2학년이다 보니 일단 아버지 외에 남자 어른을 많이 보지 못했다. 인공지능 AI가 데이터 부족으로 개와 고양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도 나 역시 많은 남자 어른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슷한 헤어스타일에 비슷한 복장을 한 비슷한 나이 대의 대통령과 담임선생님을 잘 구별하지 못했나 보다. 어쨌든 나는 벽에 걸린 대통령 사진과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혹시 대통령이 약간의 변장을 하고 우리 교실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곤 했다.(물론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그리고 그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 못지않게 카리스마가 있었다. 물론 국민학교 2학년 짜리의 눈엔 모든 선생님이 카리스마 있게 보이겠지만 일단 그분은 별 말이 없는데도 꼬맹이들을 한 번에 조용히 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난장판이던 교실이 한 번에 조용해지는 것이다.(마치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의 반처럼 말이다.) 그리고 별 말을 하지 않는데도 국딩 2학년짜리들이 스스로 와서 숙제검사를 받고 일어서서 책을 읽고 심지어 스스로 벌까지 섰다.-요즘에는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일이지만 그때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참고로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군사부일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런 선생님이-그분의 성함은 지금 기억이 안 난다, 내 머리도 이제 다 됐나 보다- 내 이름을 부른 적이 딱 한번 있었다. 국어 작문-그때 작문이라고 거창하게 하진 않았는데, 말하자면 작문시간이었다.-종이에 아무거나 자기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서 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써서 내었다. 선생님은 그걸 하나하나 읽어보시더니-그때 한 반엔 아이들이 64번까지 있었다.-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와서 교탁 앞에서 아이들에게 내가 쓴 글을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작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게 아마도 내 인생 최초의 '문학의 날카로운 첫 키스'가 아니었나 싶다.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는데 다 읽고 나서는 나를 쳐다보던 64개, 아니 130개의 눈동자를 느낄 수가 있었다. 선생님이 박수를 치셨고 나를 보던 아이들도 일제히 박수를 쳤다. 130개의 손바닥이 마주쳐 만들어내는 박수소리를 내 인생 처음으로 들은 것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앞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지만 겨우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선생님이 한 번은 우리 집에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당연했던 '가정방문'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구멍가게-그때는 점빵이라고 불렀었다.-를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우리 엄마가 앉으시던 점빵 입구에 놓인, 솜이 너덜너덜 튀어나온 의자에 앉아 어머니가 내오신 사이다 한잔을 마시며 웃으셨다.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셨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드님이 똑똑해서~' 이런 류의 말씀은 안 하셨던 것 같다. 워낙 과묵한 편이라 그냥 사이다만 마시고 슬쩍 미소만 지으시고 가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미소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선생님이 가시고 나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한 번은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옆집, 민철이 형네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그 당시엔 우리 집에 전화가 없었다.- 어느 날 혼자서 집에 있는데 민철이 형이 우리 집으로 뛰어왔다.


   "**아, 너거 담임선생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받아 보래이~"


   나는 무슨 일인가 놀래서 쓰래빠를 꿰 신고 얼른 민철이 형을 따라가 보았다. 그때 민철이 형 집으로 전화가 오는 일은 일 년에 두세 번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아버지 고향에서 오는 쌀 부쳤다는 정도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아보니 정말 담임선생님이셨다. 그다음 날 개천절 기념? 백일장이 열리는데 내가 우리 학교 대푠가, 우리 반 대푠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쨌든 대표로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열리는 그 백일장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이런 벼락에 콩 구워 먹을 통보라니...) 그렇게 나는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그가 가장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물론 알겠다는 내 대답이 끝난 후 바로 전화를 끊어버리셨지만...-


   어쨌든 그래서 국민학교 2학년 생은 다음날 혼자서 용두산 공원으로 갔고 선생님은 만나지 못했지만-하기야 선생님이 직접 오신다는 말씀은 없긴 했다, 아니면 애들이 너무 많아서 못만났을 수도 있다, 그 때는 휴대폰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때였으니까~- 나는 '개천절 기념(?) 백일장!'이란 플랭카드? 현수막?이 걸린 곳 밑에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정된 수순이라면 다음날 학교에 가니 내 글이 적어도 금상 아니면 대상을 받고... 뭐 이렇게 이어지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장밋빛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난 국 2 때 이미 알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딱히 좋은 소식?은 없었고 선생님은 나에게 잘 갔다 왔느냐는 한번의 물음 이후엔 과묵함으로 수업을 계속했고 그렇게 무난하게 국 2를 넘기나 했다...


   그런데 시월이 다 가기 전에 tv에서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국부(國父)가 시해를 당한 것이다. 10월 26일의 일이었다. 나라 전체가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국부가 쓰러지니 이 나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만 같았다. 북한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광주에선 데모가 터졌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리고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여론이 형성됐다. 안 그렇겠나, 나라가 쓰러지려는 판에 데모라니...-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철저히 언론 플레이에 놀아난 것이었다.- 그때 정세가 얼마나 불안했냐 하면 국 2들도 시국을 걱정해야 하는 정도였다.-실제로 운동장 은행나무 밑에 모여 친구들과 시국(?)을 걱정하는 대화를 나눈 기억이 난다.-아니면 내가 너무 조숙했던 걸까?- 어쨌든 그 사건 이후로 전 모 씨가 정권을 잡고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고... 그렇게 대한민국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지만 국 2인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다만 그 당시의 혼란스러움, 그리고 불안함만이 나의 국 2 후반부를 온전히 지배했었다. 우리나라의 왕인 줄로만 알았던 박통이 그렇게 한순간에 가 버릴 줄은 정말 몰랐었다.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잘 다스려  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나던 10월 말에 이상하게도 우리 선생님도 어디론가(?) 전근을 가버리셨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인사이동이 있는 학기말이나 학년말도 아닌데 말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어느 날 새로운 선생님이 와서 그분은 일신상의 문제로(물론 국 2들에게 이렇게 어려운 말은 안 썼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기억의 조합이 완성된 것뿐이다.)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다는 말만 했다. 아직 제대로 된 학창 시절을 시작도 못해 본 우리는 그러려니~하고 곧 새로운 선생님에 적응했지만 나는 왠지 찜찜했다. 정말로 그분이 박대통령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음모론적인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로부터 약 43년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그때 그 선생님만큼이나 나이를 많이 먹어버렸다. 다시 오월이 오면 그분이 떠오른다. 과묵하고 제자들을 사랑했던, 요즘 말로 하면 '츤데레' 선생님, 아이 하나하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걸 키워주고자 애썼던 선생님, 요즘 이런 선생님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학교?, 학원? 학원은 일단 패스 하자, 거기는 일단 공부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니까, 이런 걸 기대할 수 없다. 남은 곳은 바로 학교다. 요즘 아무리 교권이 땅에 떨어졌고, 학교는 '잠만 자는 곳'으로 전락했다 하더라도 학교 선생님들에게 남은 블루오션이 하나 있다. 바로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고 살려주는 일이다.


   앞으로 남은 21세기는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지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 공부에 올인한다. 학부모도, 아이들도, 선생님도... 왜 그러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물론 공부를 잘하면 인생이 편하겠지만 우리의 최종목표는 그것이 아니다. 좀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내가 있음을 알리는 자아성취가 아니던가? 그리고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아성취를 하고 인생이 편해질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아이의 재능을 살려 이루는 자아성취야말로 우리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가 아닌가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 학교는, 우리 선생님은, 우리 교육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아직 무지몽매해서 엉뚱한 곳에서 헤매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보람찬 미래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밝혀주는 것이 바로 그 일이다. 아이 개개인의 재능을 찾고 그것을 북돋우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는 그 일 말이다. 그 일을 위해 학교가, 선생님이 매진해야 한다. 머언 43년 전, 나를 가르쳤던 내 인생 첫 번째, 그 선생님처럼 말이다.


지금은 성함도 기억이 안 나지만 살아계신다면, 선생님,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

   

이전 09화 나의 옛 동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