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기다려온 카타르 월드컵이 며칠 전 개막되었다 24일 저녁엔 한국과 우루과이의 조별 경기 1차전이 있었다. 손흥민의 부상투혼과 다른 한국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경기를 보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응원하다 보니 그전에 있었던 월드컵 경기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기억에 남는 월드컵 응원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부터였다. 그 대회는 마라도나의 브라질이 우승한 대회로 이른바 '신의 손'사건이 있었던 대회다.
(잉글랜드를 상대로 한 마라도나의 첫 번째 골-'신의 손' 골)
위 사진을 보면 명백하게 손을 써서 골을 넣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화질이 나쁜 중계방송, 뜨거운 멕시코의 태양, 그리고 영국을 향한 아르헨티나인들의 적개심이 묘하게 버무려져 그 분위기에 심판도 속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골이 들어간 후 마라도나의 말은 또 얼마나 기막힌가?, '물론 손으로 넣었습니다, 저의 머리와 신의 손으로요' 키가 작았던 마라도나가 어떻게 골키퍼 앞에서 헤딩슛으로 골을 넣었을까? 하는 의문은 바로 그다음에 나온, 마라도나가 50m 이상 혼자 드리블을 하며 영국 수비들의 혼을 빼놓으며 넣은 두 번째 골로 깨끗이 사라졌다. '과연 마라도나'로구나 하는 탄성이 나온 골이었다. 그 골로 이미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가 우승의 왕좌에 앉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이 대회에서 최선을 다했다. 최순호 선수의 그림 같은 중거리 슛과 대놓고 까부는 마라도나를 걷어차는 우리 허정무 선수의 태권 킥? 이 생각난다.
(이탈리아 전에서 그림 같은 최순호 선수의 슛)
(신의 손 마라도나에게 손수 태권 킥?을 시전 하시는 허정무 선수~^^;;)
그래서 당시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을 밤새도록 보고 빨간 눈이 되어, 그다음 날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어제 본 축구 얘기를 하며 '멕시코 댕가댕, 멕시코 댕가댕~' 이란 노래를 부르면서 -아마도 멕시코 월드컵 주제곡이었던 듯~- 축구공을 쫓아 운동장을 누볐던 기억이 난다.
(멕시코 월드컵 마스코트)
재밌는 것은 그렇게 같이 멕시코 월드컵을 보고 같이 축구를 하던 내 단짝 친구가 -신기하게도 저 마스코트랑 비슷 무리? 하게 생겼음~ㅋ- 지금은 진짜로 멕시코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멕시코 댕가댕~을 잘 부르던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공부를 하나 싶더니 어느 순간 멕시코 신발공장의 사장님이 되어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로 가 버렸다. 멕시코에서 형이 하는 사업을 도와야 한다는 게 그 이유긴 했지만 중학교 시절에 워낙 멕시코 댕가댕~ 노래를 많이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녀석이 옆에 있으면 월드컵을 더 재미있게 볼텐데~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잊지 못하는 두 번째 월드컵은 바로 94년 미국 월드컵이다. 94년이면 내가 강원도 춘천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른바 도하의 기적 -예선에서 일본이 본선에 올라갈 성적이었는데 마지막 상대인 이라크가 후반 끝날쯤에 일본에 동점골을 넣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한국이 본선에 올라감- 이후에 올라간 본선 상대는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이었다.(역대 월드컵을 보면 우리가 속한 조는 항상 강팀 두 팀에다 약팀 한 팀으로 우리가 3위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스페인과 볼리비아전을 각각 2-2, 0-0으로 모두 비기고 대망의 마지막 독일전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한 내무반에서 선임하사 이하 모든 중대원이 tv앞에 모여 시청 정렬을 하고 -말년병장은 tv 바로 앞에 베개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이등병은 젤 뒤에서 각잡고 정렬-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경기를 봤었다. 클라스가 한 차원 다른 클린스만의 골을 첫 골로 얻어맞아서일까? 우리나라는 맥없이 끌려가며 전반전에만 독일에게 내리 3골을 내줬다. 이번 독일전에서 비기기만 하면 16강에 올라갈 수 있는데...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런데 tv 바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던 선임하사가 뜬금없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부대원들의 타들어가던 입술은 어느새 불뚝 튀어나와 버렸다. 그리고서 선임하사는 말년병장들만 데리고 계속 축구를 시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병들은 문 입구에 서서, 일병들은 내부반 창문을 통해서 계속 축구를 시청하고 있고 나와 같은 이등병들만 잡초를 뽑는 시간이 이어졌다. 미국 댈러스의 날씨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그날도 몹시나 더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지는 날씨에 연병장의 풀 뽑기도 힘들었지만 축구 승패에 대한 궁금증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었다. 그러다가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내무반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얼른 내무반으로 달려가 보니 황선홍이 첫 골을 터뜨리고 그 특유의 세리모니를 하는 것이 슬로비디오로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다시 응원 대형으로 정렬했다. -고참들은 tv앞에서 응원하고 쫄다구 들은 침상 끝에서 목을 빼고 응원- 그리고 가열찬 응원으로 부대가 떠나가라 응원하던 중 터진 홍명보의 중거리슛~골인!,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모든 중대원이 하나가 됐다. 그렇다!, 그 순간만은 계급을 떠나서 모두가 하나가 된 기억이었다. tv 바로 앞에서 비스듬히 누워 보던 말년병장과 맨 뒤에서 각잡고 보던 이등병 막내가 하나 된 기억. 하지만 경기는 2-3으로 졌고 우리는 16강에 가보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는 아쉬움 하나는, 왜 선임하사는 뜬금없이 하프 타임 때 우리를 잡초 뽑으라며 연병장으로 보냈을까? 우리가 계속 응원을 했다면 어쩌면 이기거나 아니면 한골을 더 넣어서 비기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월드컵 세 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2002년 한일월드컵이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터키와의 3,4위전이다.
94년도에도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독일이 2002년에도 우리를 4강에서 주저앉혔다. -그러고 보면 독일이야말로 우리가 반드시 잡아야 할 숙적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3, 4위 결정전에서 만난 터키. 비록 결승에는 못 올라갔지만 터키를 잡고 3위에 등극하고픈 마음이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갖는 감정이었다. 올림픽에서도 금, 은, 동 외에는 잘 쳐주지 않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삼세번, 삼세판을 좋아하기 때문에 '월드컵 4강 진출'과 '월드컵 3위'라는 말은 그 어감부터 달랐다.
그때 나는 이미 소방서에 들어와서 모 소방서에서 2년 차 구급대원으로 한창 뛰고 있었다. 출동이 걸리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고참들의 명?을 받아 센터 사무실 tv앞에 치킨과 콜라를 정성스레 세팅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터키전을 관람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뒤로 돌린 공을 받은 홍명보가 어버버~하고 알을 까버렸고 그걸 놓치지 않은 터키 선수가 경기 시작한 지 1분도 안돼서 우리의 골망을 갈라버린 것이었다. 나는 종이컵에 골라를 따르면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는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따르던 콜라를 테이블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은 계속되었다. 내가 콜라를 테이블에 쏟자마자 구급출동이 걸린 것이었다.
"구급출동!, 구급출동!"
"OO나이트클럽, 환자 머리에 피 흘리고 있고 폭행 추정됨!"
'아니, 이런 X 같은 경우가...'
우리는 연거푸 찾아온 두 번의 불행을 한탄하며 구급차에 올랐다. 사고 현장에 가 보니 앞의 두 사건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관내에는 'OO나이트'라고 중장년층들이 주로 이용하는 대형 나이트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왜?, 그것도 대낮에 월드컵 응원은 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워낙 월드컵 열기가 뜨거워 사람이 모이는 장소라면 어디든,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모여서 응원을 하곤 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나이트클럽 사장님 입장에서는 월드컵 때문에 장사도 안되는데 낮에 응원을 핑계로 가게를 열어놓으면 맥주도 팔고 좋지 않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그 나이트클럽에 도착해 보니 머리에 노랗게 물을 들인, 삼십 대 정도의 여자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기도?의 말에 따르면 터키 -지금은 물론 '튀르키예'로 국호가 바뀌었다.- 가 한골을 넣는 순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남자 친구가 맥주병으로 여자의 머리를 내리쳐서 여자의 머리에 피가 나는 것이며 그 남자 친구는 자기네가 잡아놓았다는 것이다. 일단 여자만 응급처치를 해서 병원에 옮기면 남자는 자기네들이 경찰이 오면 경찰에게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달랐다. 여자 친구와 자신은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테이블에서 온 사람이 맥주병으로 자신의 여자 친구의 머리를 가격했고 그래서 피가 나는 것인데 기도들은 아무런 죄 없는 자신을 범인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었다. 양쪽의 말이 너무 다르므로 여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았으나 여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울기만 하고 머리에선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여자의 머리를 응급 처치하고 그녀를 먼저 병원에 이송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여자가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남자 친구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자 친구를 같이 태우려고 하자 이번에는 기도들이 안된다며 막아섰다. 범죄자를 그냥 도망가게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이런 정의감에 불타는 기도를 봤나?~ 이것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라도 좀 빨리 오면 될 텐데 경찰차는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 않고 양쪽의 실랑이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경찰이 없는 상태에서 양쪽의 실랑이를 지켜보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월드컵 보느라 늦게 오는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때쯤 경찰차가 도착했다. 경찰은 일단 피해자와 그 남자 친구를 분리시키고 여자를 먼저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울고 있는 피해자를 달래 가며 병원으로 이송했다. 거리에 차가 별로 없어서 수월하게 갈 수는 있었는데 문제는 병원 선정이었다. 찢어진 부위가 제법 넓고 안면까지 이어져 있어 정형외과와 성형외과를 같이 진료하는 병원을 찾아야 하는데 전문병원을 선정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겨우 선정해서 도착해 보면 전문의가 웬일인지 그날따라 부재중이었다. 우리가 2, 3번의 전원(다른 병원으로 이송함)을 거쳐 겨우 전문의에게 환자를 인계하고 센터로 귀소해 보니 터키전은 이미 끝나 있었다. 아나운서의 해설을 들어보니 한국이 터키에게 2-3으로 아쉽게 져서 월드컵 4위에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경기가 다 끝나고 나서 터키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며 유니폼을 바뀌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 그라운드를 걸어 다니던데 겨우 환자를 병원에 이송하느라 제대로 된 게임을 보지 못하고 응원도 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다지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다. 다른 한국 선수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하나같이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나처럼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들이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경기를 보지 못했고, 그리고 그 경기는 패했고, 그런 경기가 제일 많이 기억에 남아있다. 열심히 응원을 하고 후련하게 이긴 경기보다도 왜 그런 경기들이 더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도 축구와 무척이나 많이 닮아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 해보니 못한 일에 대한 미련이 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 과를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녀와 사귀었다면?, 그 직장에 들어갔었더라면?... 그런 기억들이 더욱 우리의 기억에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도 패한 축구 경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일부다. 패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듯이 그런 과거가 없다면 우리의 현재도 없는 것이니까... 우리는 과거의 패배들을 곱씹으면서 승리의 그날을 꿈꾼다. 우리 인생도 아쉬웠던 순간을 곱씹으면서 조금 나아질 미래를 꿈꾸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게는 패한 축구경기의 아쉬움처럼 지나간 날의 아쉬움도 소중하다. 승리한 날의 기억처럼 패배한 날의 아쉬운 기억들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니까... 그 기억을 발판 삼아 더 나은 내일이 되기를 꿈꾼다. 그리고 우리 한국 축구가 언젠가는 황금빛 월드컵을 들어 올릴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