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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방관아빠 무스 Feb 03. 2023

나의 옛 집

아침 동산에서(30)

   위 사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집은 내가 초, 중, 고 시절에 살았던 집이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이사 와서 대학 1학년 즈음까지 살았으니 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오롯이 저 집에서 보낸 셈이다. 지난번 글 -나의 첫 자전거 라이딩- 에서 말했듯이 어느 일요일 오후, 중학교 때 친구와 지하철역에서 만나 옛길을 걸으며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자전거포를 지나 결국 내가 살던 집에까지 이르렀다. 


https://brunch.co.kr/@muyal/98


(내가 살던 옛집의 정면 사진-여태껏 저 자리에서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버티고 있었구나~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지도 벌써 25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저렇게 저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니 내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적잖게 고마웠다. 위의 사진에서 이층 오른쪽 창문이 있는 방이 내 방이었다. 이 집은 부산 말로 하면 약간 산만디(?)에 있는 집이라 이층에서도 막힘 없이 부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난 저 방에서 라디오도 듣고 공부도 하면서 -사실 책만 펴놓고 라디오를 들으며 딴생각?~ㅋ- 부산의 전경을 감상하곤 했다. 특히 비 오는 날 밤에 라디오를 들으며 가로등이 켜진 부산의 전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때 내 나이 또래보다 좀 조숙했던 것일까? 지금도 기억나는, 그때 라디오에서 들었던 노래는 바로 이것이다.


 https://youtu.be/1UgDXWuM42c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이 어둠의 이 슬픔' -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를 클릭하면 동영상 재생됨~)


   그때 내 방은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는 마루방으로 되어 있어 겨울에는 전기장판을 켜고 생활해야 했지만 그 음악과 전경은 아직도 내 귓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남아있다. 사춘기 시절의 풋풋했던 내 감수성을 안아준 내방, 그래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비가 조금 오면 전망도 좋고 분위기도 좋았던 저 집이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여름철에 태풍이 올라오거나 장마가 져서 비가 많이 내리면 바닥부터 슬슬 물이 차기 시작했던 것이다. 약간 산만디에 있어 상식적으로 비가 내리면 물이 잘 빠질 것 같은데 아니었다. 우리 집 부엌은 이상하게도 거실이나 방바닥보다 1m 정도 아래로 꺼져 있었는데, 비가 많이 오면 부엌과 또 작은방 아궁이 -평소에 거의 쓰지 않음- 안으로 물이 찰랑찰랑 차 올라오곤 했던 것이다. 


   태풍 셀마가 올라오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중3쯤이었고 우리 -나와 어머니와 누나. 아버지는 직장에 가 계셨음- 는 손에 바가지를 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부엌과 아궁이로 올라오는 물을 바깥으로 퍼내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kbs가 재난주관 방송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 재난방송을 하듯이 각 지역의 큰 강변에 기자를 보내서 현장상황을 보도하곤 했었다.


(장마철의 댐 방류-네이버 블로그 '투희 이야기' 갈무리)


   "이 **기자가 한강에 나가 있습니다, 이기자 나와 주시죠."


   "네, 여기 한강변은 점점 물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잠수교는 이미 물에 잠겼고 그 밖에..."


   "네, 그럼 낙동강에 나가 있는 김**기자 연결해 보겠습니다, 김기자?"


   "네, 여기 낙동강은 높은 물살과 함께 태풍의 거센 바람이 강둑을 집어삼킬 듯..."


   "네, 그럼 영산강에 나가있는 최기자?"


   이런 식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는 폭우가 내리면 한반도 전역에 폭우가 내렸고 태풍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좁은 한반도, 그것도 좁디좁은 남한에서 어느 한 곳만 집중 폭우가 내린다거나 태풍의 영향을 많이 입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걸 보면 이게 이상 기후 탓인지, 아니면 방송의 정확성이 높아져서 그렇게 피해지역을 잘 분석해 내는 건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둘 다가 아닐까 한다. 어쨌든 태풍 셀마가 오던 날도 그렇게 전국의 5대 강에 기자들이 나가서 돌아가면서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기자들의 목소리 톤이 고조될수록 우리 집 아궁이와 부엌의 수위는 상승하고 있었다. 


   "네 팔당댐 수위는 점점 올라가 지금은 ***미터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수문은 모두 개방된 상태지만 경계수위인 ***미터를 넘어가면 댐이 붕괴될 수 있으므로 아래 마을에 거주하시는 분들께서는 대피...


   "무스야!, 여기 아궁이 물 넘어온다, 빨리 바가지!"


   "네, 여기 낙동강은 만조 시간대와 맞물려 물이 하류로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약 50cm 정도만 수위가 높아지면 제방을 넘어 인근 마을까지 범람할 기세인데요, 강 하구에 사시는 분들께서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시고..."


    "누나, 부엌에 물이 넘치면 안방으로 바로 넘어와, 그러면 장판, 벽지는 물론이고 가구까지 다 버리니 내가 부엌에 물을 퍼낼게, 누나는 아궁이를 맡아!"


    "네, 여기 금강 하구에는 약 160 가구가 물에 잠기고 **마을은 고립되어 인명구조와 물자지원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현재 군과 민방위 대원이 투입되어 사상자를 구조하고 구호물자를 나르고 있지만 역부족..."


   "무스야, 여기 물들어온다!, 이거 우짜노!"


   엄마의 울부짖음에 아궁이 쪽을 돌아보니 정말로 스멀스멀 올라온 물이 아궁이를 넘어서 1층 거실로 밀려들고 있었다. 아버지도 없는 상태에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퍼붓고 있었고 우리 셋이서 퍼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방송에서는 전국 5 대강들의 범람상태를 방송하고 있었으나 거기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한 바가지라도 더 퍼내어 물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정신없이 바가지로 물을 퍼내서 대문 바깥으로 던졌다. 한참을 그렇게 물과의 사투(?)를 벌였을까? 방송에서 기쁜 소식을 먼저 알려 왔다.   


   "네, 이제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고 있습니다, 태풍 셀마는 오늘 oo시를 기해 강원도 동해안 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각 지역에 나가 있는 특파원들, 소식 전해 주시죠."


   "네, 여기 팔당댐은 경계수위 30cm를 남겨두고 더 이상 물이 불어나지는 않고 있습니다. 상류에 있는 화천댐에서는 방류량을 줄였다는 소식이 있으니 여기도 조만간 방류량을 줄이고 수문을 닫을 수 있을 듯합니다."


   "네, 여기 한강에서도 팔당댐의 방류량이 줄어듦에 따라 잠수교 수위가 낮아져 잠수교가 서서히 물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네, 여기 낙동강도 점점 물이 빠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행히 범람은 피했으나 하류에 있는 주민들은 만조 시각과 겹쳐 마을 간 고립을 피할 수 없었는데요, 그나마 비가 그치고 있어 몇 시간 후면 차량통행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송에서 그렇게 말하자마자 우리 집 아궁이의 수위(?)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거실 위로 밀려온 물이 좀 있긴 했지만 그 정도라면 마른걸레로 닦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바깥의 빗줄기도 아까 물폭탄 수준이던 것이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먹구름이 걷히고 하늘에도 약간 하얀 부분이 드러났다. 우리는 모두 기진맥진하여 안방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여기서 더 들이부었으면 어쩔 뻔 했노?"


   어머니는 그래도 거실과 안방사이의 문턱에 받쳐놓은 수건들의 물기를 대야에 짜면서 말했다. 


   "그래, 하늘에서도 죄 없는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는 갑다, 우리 아궁이에서 물이 거실로 막 스며들 때 그래도 비가 좀 덜 내리니 얼마나 고맙노?"


   누나도 한강이 된 부엌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엄마는 그나마 나라도 있었기에 다행이지 아버지도 없는 상태에서 물이 계속 밀려들었다면 아마도 거실과 안방이 모두 물바다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왠지 좀 뿌듯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는 내가 이 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저 집도 우리 집이 아니지만 이제 다시 와 보니 옛일이 모두 다 떠오른다. 잠시나마 그 옛날의 일들을 떠올리게 해 준 저 집이 그래도 아직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조만간 누나와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한번 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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