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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방관아빠 무스 Apr 24. 2024

의대와 마라탕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50)

(대문 사진-첫째가 다니는 부산 S여고에서 진행된 입시 설명회)


한 달 전쯤 첫째의 학교에서 하는 입시 설명회에 다녀왔다. 이제 정말 첫째가 고3(高三)이 된 실감이 들었다.

요새는 애들 성적순으로 1등급, 2등급, 3등급... 등으로 나눈다던데 이거 무슨 벼나 한우 등급도 아니고 어감이 좀 그렇긴 했다. 엄마 아빠인 우리가 한 이십 년 동안 애들을 키워 온 건 사실이지만 무슨 농부가 농산물을 키우듯이 1등급을 받으려고 키워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공부 성적을 기준으로 일 등급에서 몇 등급까지 애들을 나눈다니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공부만 좀 못할 뿐이지 자기 나름대로 타고난 재능과 잘하는 분야가 있을 텐데 성적을 기준으로 이렇게 소처럼(?) 등급을 나눈다니 이거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라떼 인기를 끌었던 영화-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라떼도 물론 애들을 성적으로 줄 세우는 건 있었다. 고3(高三)이 아니라 고3(苦三)이란 말도 있었고 3당 4락(3시간 자면 대학에 떨어지고 4시간 자면 대학에 합격함)이란 말도 있었다. -그럼 난 다섯 시간 자서 지금 이렇게?~ㅋ- 어쨌든 성적으로 줄 세우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때 우리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정신 승리(?)를 했던 것 같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내 나이 한 오십 먹으니 '그래도 행복은 50%쯤은 성적순이란다.' 하고 첫째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도 저 때는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이 꼰대라고 생각했으니까~  


첫째의 학교에 도착해서 입시 설명회장에 들어서자 강당을 가득 채운 학부모들의 검은 머리들이 보였다. 무대에서는 1학년 담임선생님들의 소개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입시 설명회는 시작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1학년 선생님들의 소개가 끝나고 2학년 담임선생님들의 소개, 그리고 3학년 담임선생님들의 소개가 끝난  후에야 3학년 부장선생님이라는 분이 나와서 입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입시 설명회에서는 우리 때와는 달리 엄청 복잡해진 수시와 정시의 경우의 수, 그리고 추가 선발을 통해 대학교에 진학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그런데 올해는 거기다가 의대 증원 문제와 맞물려 여러 가지 변수가 더해졌다고 한다. 우리 때는 오로지 대입 학력고사 하나의 시험만으로 인생이 결정되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선택지를 넓힐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 복잡한 대입 평가 방법으로 안 그래도 혼란스러울 아이들이 더욱 혼란스럽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다가 올해는 의대 증원으로 2000명이나 의사가 될 아이들을 더 뽑는다고 하니 벌써부터 아이들 성적을 가지고 눈치 싸움하는 어른들의 욕심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우리 때도 눈치싸움은 있었지만 요즘은 그 정도를 넘어서 지방 학생들로만 뽑는 '지역 인재전형'이란 걸 통해서 의대에 입학하려고 일부러 지방으로 이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우리 때도 있었던 '맹모 삼천지교'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째는 의대를 갈 실력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그래도 tv 시리즈 '낭만닥터 김사부'나 '슬의생'등을 보면서 의대에 대한 꿈을 키워왔단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좀 더 열심히 해서 의대에 도전해 보라고 내 딴에는 격려를 해 주었더니 한숨만 푹푹 쉰다. 아마도 자기가 걸어갈 험난한 길을 보니 한숨부터 나오나 보다. 그래서 이번에 안되면 재수를 하더라도 아빠가 밀어주께~ 하면서 기를 살려보려 했으나 첫째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까마득히 높이 달린 포도를 여우에게 따라고 하니 한숨부터 나오는 그 마음, 아빠가 잘 알지. 차라리 그 포도는 신 게 분명하다며 포기하며 뒤돌아서는 게 더 편하다고 하면 그것도 첫째의 선택이니 아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단다. 그것 역시 첫째가 살아갈 자기 인생의 선택이니까...


입시 설명회를 마치고 첫째를 차를 태우고 학교 입구 골목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첫째가


"여기 마라탕 집 차리는 사람이 제일 승잔데..."


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첫째가 마라탕을 좋아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기에 무슨 말인가 하고 물어보니 자기 친구들 대부분이 마라탕을 좋아하는데 학교 정문 입구에 마라탕 가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후문에는 마라탕 가게가 하나 있긴 한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등하교하는 정문 입구에는 마라탕 가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마라탕 가게를 차리면 불티나게 잘될 거란 얘기였다. 


'그럼 첫째야, 이번에 정말 열심히 한번 해보고 정 안되면 네가 저기 마라탕 가게 차려라, 아빠가 밀어주께!'


난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첫째가 마라탕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인생을 사는 뻔한 스토리가 식상하다면 네가 좋아하는 일에 승부를 걸어보렴, 그것이 너의 재능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일이라면 아빠는 무엇이라도 대 환영이다. 꼭 의대를 나와야만 행복한 건 아니니, 네가 즐겁게 일을 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그게 너와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이니...'


또 한편으로 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진짜로 첫째가 마라탕 가게를 차린다고 하면 어쩌지?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이의 미래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만 보자, 그리고 정말 그런다고 하면 그땐 또 무슨 수가 생기겠지...'


나는 차속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첫째의 고3(苦三) 시절이 너무 쓰디쓰게 지나가지 않길, 행여 그렇더라도 훗날 그 쓰디쓴 날들을 되돌아보며 의미 있었다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날들이 되길, 그리고 그 쓴 날들을 옆에서 지켜준 사람으로서 아빠로 기억되길, 그래서 이제부터 첫째의 인생이 아름답게 펼쳐지길. 첫째의 무거운 가방을 보며 잠시 고3 아빠로서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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