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간다는 것(15)
지난 화요일에는 엄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매주 화, 목, 토는 엄니가 신장투석을 하러 병원에 가는 날인데 마침 그날이 내가 비번인 날이라서 엄니를 모시고 투석병원에 다녀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또 엄니가 한 달에 한번 이비인후과에도 가는 날이었다. 신장이 안 좋아져 혈액투석을 받는 엄니는 보너스(?)로 오른쪽 귀에는 진주종을 달고 사신다. 원래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나이도 많고 제반 여건(?)이 좋지 않아 한 달에 한번 이비인후과에 가서 그동안 자라난 진주종을 긁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날도 엄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짚고 병원에서 나와 내 차에 타셨다. 물어보나 마나 엄니의 표정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혈액투석을 받으신 데다 오른쪽 귀에 진주종을 긁어내셨으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뭐라고 얘기를 드려도 아픈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엄니에게 당신이 좋아할 만한 점심 메뉴를 제안했다.
"엄니, 오늘은 칼국수 먹으러 갈까?, 아니면 콩국수?"
"칼국수?"
엄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아버지가 살았을 적에 우리는 그 칼국수집에 자주 갔었다. 겨울에는 칼국수를 팔고 여름에는 콩국수를 파는 집이었다. 아버지가 콩국수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여름이 시작되는 6월부터는 매주 한 번은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엄니는 여름이 시작되면 그 칼국수집을 떠올리곤 하셨던 것이다.
"그래, 오늘 날씨도 이리 따땃(?) 하니 콩국시를 팔지도 모르것따, 한번 가보자!"
엄니는 뒷좌석에서 이렇게 호기롭게 말하셨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엄니에게 그 칼국수집에 가는 것은 그저 점심 한 끼를 때우려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엄니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살았을 적의 느낌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그곳에서 예전 주인장과 눈인사를 하고 콩국수와 칼국수를 먹으면서, 따라 나오는 단무지와 깍두기를 씹으면서 아버지와 먹었던 그 느낌은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 칼국수집으로 차를 몰았다. 모래를 씹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던 엄니의 얼굴도 나뭇가지에 부는 봄바람처럼 살짝 풀리는 느낌이었다.
차를 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우리에게 눈인사를 하던 그 주인장 영감은 보이지 않았다. 작년만 하더라도 우리가 들어서면 눈인사를 하며 '바깥양반은 왜 안 왔어?'라는 듯한 눈빛을 보이던 영감이었는데 오늘은 국수를 삶던 그 아들과 며느리만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고, 여기는 여전히 손님이 많네~"
엄니는 들어서자마자 주인 아들 내외가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시네요"
그 집 아들이 국수를 삶다 말고 우리를 보고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하기야 작년 이맘때 오고 딱 일 년 만이니 오랜만이긴 했다. 나는 주인장 어른은 어디 가셨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한 때 단골이긴 했지만 그런 말까지 할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혹시라도 그분이 어떻게 되셨다는 말을 들으면 오랜만에 기분 좋게 점심 먹으러 왔는데 난데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추억을 들으며 엄니의 눈물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니는 자신이 겪은 것과 와 비슷한 스토리를 누군가에게 들으면 그 자리에서 자신의 스토리를 꺼내서 곱씹으며 눈물을 흘리는, 그 또래 할머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런 루틴(?)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얼른 가까이에 있는 자리에 엄니를 앉히고 메뉴판을 살펴보았다. 콩국수와 칼국수! 여기서는 짜장면과 짬뽕처럼 선택장애를 느끼게 하는 메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는 여름이 오면 꼭 여기 콩국수가 생각난다며 여기로 가자고 했다. 그걸 보고 엄니는 아버지가 말띠라서 콩국수를 좋아한다고 했다.
"말이 여름에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땀을 많이 흘리니, 그러니 시원한 콩국수로 더위를 달래려는 거지!"
하기야 나도 언젠가 말들이 콩을 먹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당근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말은 콩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니의 말에 묘하게 설득이 되었다. 엄니는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에게 콩국수를 시켜주셨다. 하지만 엄니는 정작 콩국수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콩국수가 싫다고 하셨어~)
"난 저렇게 찹은(차가운) 거는 보기만 해도 몸이 떨려, 그러니 난 칼국수를 시켜 주렴!"
엄니는 그렇게 말하고 더운 여름에도 칼국수를 드시곤 하셨다. 당신은 뜨근한 국물이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는 여름이 되면 콩국수가 땡겼다. 그래서 엄니는 칼국수, 난 콩국수를 시켜려고 했다. 하지만 종업원은 아직 일러서 콩국수는 안 한다고 했다. 아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렸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 종업원은 요즘엔 비빔칼국수를 한다고 했다. 엄니에게 비빔칼국수를 드시겠냐고 물어보니 그러자고 하셨다.
"그럼 여기 비빔칼국수 두 개하고 김밥 한 줄 주세요!"
나와 엄니는 새로 나온 비빔칼국수를 먹어보기로 했다. 콩국수를 먹기엔 너무 이르고 칼국수를 먹기엔 약간 더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빔칼국수를 먹기엔 또 양이 너무 작고 매울까 봐 김밥도 하나 시켰다.
음식이 다 조리되자 종업원들이 칼국수와 김밥을 들고 나왔다. 그런데 그 종업원들 둘 다 묘하게 주인장 어른과 그 아들을 닮아 있었다.
"혹시 여기 손자?"
나는 그들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그들은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아직 취직이 되지 않아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그렇게 빠르고도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빠진 자리에는 두 손자가 커서 그 일을 대물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콩국수와 칼국수가 없는 자리에 비빔칼국수가 자리를 대신한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의 추억의 맛을 되새기려 왔지만 콩국수의 맛은 보지 못하고 새콤한 비빔칼국수와 앙증맞은 김밥을 맛보게 된 날이었다.
언젠가 나 역시 이 가게에 와서 아버지를 떠올리며 콩국수를, 엄니를 떠올리며 칼국수를 먹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역시 저 두 젊은이들이 사장이 되어 나를 맞이하겠지, 그리고 내 옆에도 더 이상 아버지와 엄니가 아닌 마눌과 우리 아이들이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좀 허전하긴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니까, 세월이 원래 그런 거니까...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까지는 난 여전히 엄니를 모시고 병원에도 가고 칼국수집에도 오는 그런 평범하고도 고즈넉한 시간들을 엄니와 함께 차곡차고 채워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