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는 엄니와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한식(寒食)을 맞아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러 간 것인데 그곳에 간 김에 여행 삼아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오자는 누나의 말에 옳다구나 맞장구를 친 것이었다. 하기야 이제 엄니와 여행 갈 일이 몇 번이나 남아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니 누나도 나도 이번에는 매년 하듯이 당일치기로 갔다 오지 말고 어디 근사한(?) 호텔을 잡아 하룻밤을 보내며 일생동안 고생만 하신 울엄마에게 호강 아닌 호강을 시켜드리자는 마음이었다.
출발은 좋았다. 부산에서 경남 남해로 향하는 남해 고속도로에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벚꽃들이 우리에게 잘 갔다 오라고 손을 흔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벚꽃 시즌이긴 하지만 평일인 데다 다음날 비 예보가 있어서인지 남해로 가는 내내 차는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가벼운 봄바람에 벚꽃 잎이 날리는 날씨에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다. 엄니는 내 차 뒷좌석에 누나와 함께 앉아 '아이고 좋다!'를 연발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렇게 즐거운 표정은 정말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 엄마, 매일 그렇게 집에만 있지 말고 이렇게 교외로 나오니 얼마나 좋아, 우리 일 년에 한두 번은 이렇게 아빠 산소에 성묘 간다는 핑계로 여행 갑시다, 이제 뭐 돈 아낄 거 뭐 있어, 즐겁게 지내면 되지 뭐~"
누나가 엄니에게 이렇게 말하자 엄니는
"그래도 니들이 고생이다. 애들 키우니라 바쁠낀데... 특히 아범은 막둥이 키우려면 한참 남았는데 이렇게 돈을 펑펑 써서야 되겠니?"
하고 말하셨다. 봄바람을 맞으며 꽃구경 삼아 아버지 산소를 돌아보러 간다니 기분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예약해 놓았다는 고급 호텔이 맘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우리가 엄니 팔순잔치 한다고 모아놓은 돈이 있으니까 그걸로 쓰면 돼요, 엄니는 그때 아파서 팔순잔치도 제대로 못했잖아."
내가 이렇게 거들었다. 사실 엄니의 팔순은 2020년도였는데 그 해 당신은 생신 즈음에 집에서 낙상사고로 근 육 개월 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지셨고 하반기에는 코로나에 걸려서 병원 음압병실에서 한 달이나 계셨기 때문에 도저히 팔순잔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잔치를 할 요량으로 나와 누나가 모은 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년이나 지난 지금 팔순잔치를 다시 할 수는 없고 그 돈으로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남해로 짧은 여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남해에 도착하자 아버지 산소로 올라가는 길에 엄니는 차창을 내리고 그곳의 바람을 맞으셨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아버지의 묘소에 도착하자
"여보, 내가 왔소, 여기서 잘 지내고 있죠?"(요즘 말로 하면 오겡끼 데스까? 되시겠다.)
하며 아버지의 비석을 어루만지셨다. 당신의 이름도 그 밑에 쓰여 있는 그 비석을 말이다. 우리 가족묘는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선산에 있는 증조부 무덤부터 모두 이장해 왔다. 그래서 증조부 내외부터 조부내외,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세 분 내외와 작은 아버지 두 분이 모두 같이 누워 계시는데 그분들 앞에서 좀 내외(?)를 하셔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아무렴 어떤가, 요즘 같은 시대엔 그분들도 이해해 주시리라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아버지와 여러 남해분(?)들이 잠들어 계신 공원묘원)
가족 묘소에서 성묘를 하고 바로 남해 A호텔로 향했다. 오면서 남해 맛집(?)에서 점심을 먹어서 일단 거기에 투숙해서 쉴 작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출발할 때는 푸르렀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잿빛으로 변한 하늘은 언제라도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듯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한층 더 우울해진 하늘)
아니나 다를까 객실에 짐을 풀고 산책을 하러 나왔을 때는 이미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남해 바다를 바라보며 엄니를 모시고 호텔 산책로를 거닐 생각을 하고 있던 우리의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엄니는 피곤하다며 당신은 객실에 남아있겠다며 우리끼리라도 걷다 오라고 하셨다. 호텔 안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이라도 둘러볼 요량으로 나섰는데 세차게 내리는 비에 금방 되돌아와야 했다.
(비가 떨어지기 직전의 A호텔)
객실로 돌아와서 결국 엄니와 함께 객실에 설치된 대형 TV를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엄니에게 뭔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집에서처럼 멍하니 소파에 앉아 TV를 볼 수밖에 없다니... 좀 아쉽긴 했지만 날씨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그냥 엄니 옆을 지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해가 지자 빗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우리는 밖에 나가 저녁을 먹기도 번거로울 것 같아 그냥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시켰다. 남해 맛집(?)에서 점심을 거하게 먹어서 엄니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긴 뭔가 아쉬울 것 같아 치킨과 족발을 시키기로 했다.
(룸 서비스로 시킨 치킨과 족발 위로 보이는 엄니의 무릎과 누나의 손, 그리고 내가 마신 맥주 한 캔)
나도 호텔 냉장고에 있는 캔맥주 하나를 꺼내 마셨다. 가끔 이런 호텔에 와서도 냉장고에 있는 뭔가를 건드린 적은 없었는데 이건 엄니와의 여행에서 누리는 최고의 호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엄니를 위한 여행에서 나를 위한 호사라니~ㅋ)
다음날 아침, 여전히 내리는 비를 보고 그날의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남해의 관광지인 독일 마을이나 근처 하동에 있는 화개장터에 가려고 했었다. 특히 엄니는 몇 년 전 이맘때 아버지와 함께 갔던 화개장터를 다시 가보고 싶어 하셨다. 이맘때 화개장터에 가면 벚꽃은 물론이고 벚굴과 재첩국, 참게탕등 제철 음식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야속하게 비가 오는 것이었다.
"아범아, 오늘은 어디 갈 생각 말고 우리 논 부치는 사람 집에 한번 가보자, 이렇게 비가 오니 아마 집에 있을 거다. 그 사람한테 우리 논 잘 부치라고 말도 좀 하고..."
"아니, 엄마, 오늘 우리 여행 왔잖아, 비가 와도 좀 놀다 가야지, 이제 거기 가면 어떡해?"
누나가 이렇게 앙탈(?)을 부려봤지만 엄니의 마음은 확고부동이었다.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사람들 만나서 우리 논 잘 부치라고 부탁도 좀 해야지,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엄니의 말씀대로 우리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우리 논을 부치는 영감님 집으로 향했다. 넓지는 않지만 남해엔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땅이 좀 있었다. 매번 올 때마다 들리지는 못했지만 그 영감님은 해마다 나락이 나오면 우리 집에 몇 가마씩 부쳐주곤 했다. 그걸로 엄니와 우리, 그리고 누나네까지 갈라먹곤 했던 것이다. 엄니는 그게 신경이 쓰여서 오랜만에 여행이랍시고 온 본래의 목적을 잊고 그 사람 집에 부탁을 하러 가려는 것이었다. 엄니는 빗속을 뚫고 그 집 앞에 있는 농협에서 베*밀 1박스를 사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 그 사람 집까지 우산을 받쳐 들고 들어갔다. 엄니의 예상대로 그 사람은 비가 와서 그런지 집에 있었다. 엄니는 사 온 베*밀을 드리고 앉아서 얘기하다가 지난번에 쌀 택배비를 안 줬다며 어디서 꺼냈는지 꼬깃꼬깃 접은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그 영감님 손에 쥐어주려 했다.
"아닙니더, 그건 우리가 내 왔던 것인디..."
영감님은 받지 않으려 했지만 엄니는 한사코 그분 손에다 쥐어주려 했다. 보다 못한 그 집 할머니가 그 돈을 받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차로 돌아가는 길에 난 엄니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그분에게 택배비까지 드린 거예요?, 우리 논을 부쳐먹고 있는 사람인데..."
"아니다, 요새 시골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농사 지을 사람이라곤 저런 사람뿐이야. 그러니 놀고 있는 땅이 얼마나 많겠니?, 그런데 저런 사람이 우리 땅을 농사지으려고 안 하면 조상 때부터 내려온 우리 땅이 완전 폐허가 된단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는 거꾸로 땅주인이 땅 부치는 사람에게 사정해야 할 판이란다."
엄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저세상 가는 날까지 조상 때부터 내려온 우리 땅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 듯...
그 이후로 부산 가는 길은 비가 많이 와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다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퇴근시간에다 마침 수요일인 '가정의 날'과 맞물려 극심한 교통정체에 갇혀버렸다. 엄니는 차 안에서 내가 소방서에 가는 시간에 늦을까 봐 노심초사하셨다. 나는 그날 저녁 6시까지 소방서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엄니, 제가 1시간 지참 내놨으니 7시까지 들어가면 돼요."
난 이렇게 말했지만 엄니의 걱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도 소방서 상관들이 알면 뭐라고 하지 않겠니?, 괜히 너희들 말대로 하룻밤 자고 오려고 했다가 너 직장생활까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니?"
정말 걱정도 팔자인 엄니셨다. 그렇게 평생 동안 걱정으로 살아오셨어도 여전히 이제는 오십이 넘은 아들의 직장생활이 걱정되는가 보다. 그리고 당신이 아니라면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땅이 어떻게 되기라도 하는 줄 아시나 보다. 그렇게 걱정이 많으시니 평생동안 하루라도 발 뻗고 주무신 적이 있으셨을까?
그래도 이제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도 걱정 안 하실 엄니가 아니니까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조그만 걱정들은 어떻게 보면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거니까... '엄니, 이제부턴 아무 걱정도 마세요'가 아니라 '엄니, 이제부턴 이런 조그만(?) 걱정들만 하세요' 난 속으로 이렇게 엄니에게 조용히 말해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