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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방관아빠 무스 May 10. 2020

여전히 생각나는 그 이름, 아버지

아침 동산에서(2)

   우리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적 아버지였다. 가부장이라고 하면 요즘은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니지만 내가 자라던 7~80년대만 해도 당연하게 여겨지던, 아니, 그냥 당연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한, 그런  삶의 태도였다. 에서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라고 여겼고, 자녀의 생일보다는 조상의 제삿날을 백배쯤은 중요하게 생각했고,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을 효도의 제일 앞에 놓았다. 아니, 대를 잇는 것뿐만 아니라 장남이 남들이 알아주는 높은 자리에 올라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워주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아버지는 내게 기대가 참 컸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릴 땐 공부를 곧잘 했던 내가 그때만 해도 지방 명문대(?)였던 모 대학을 졸업하자, 당연히 '펜대 잡는' 직장에 취직할 거라고 생각하셨다. 평생 동안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 살아오신 아버지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 실내에서 편하게 일하는, 소위 '펜대 잡는' 직업을 갖길 간절히 바라셨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졸업하던 해가 1998년 2월, IMF가 터진 직후라는 데 있었다. (주)대우를 비롯해서 수많은 회사와 은행이 도산하고 수많은 직장인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지방의 문과대를 나온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공무원 시험이라도-그때만 해도 공무원은 마지막 카드였다.- 보라고 하셨지만 난 어린 마음에 행정공무원은 사무실에 앉아 주민등록 등본이나 떼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공무원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소방공무원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 년 만에 소방관 시험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공무원이긴 하지만 아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공무원. 그때 소방관이란 직업의 위상이 그랬다. 아버진 다른 건 다 떠나서, 그 힘든 데 가서 잘할 수 있겠냐고, 내게 그렇게 물어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아들의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 결국은 그 말을 하지 못하셨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지났고 아버지는 지금 내 계시지 않는다. 몇 년 전, 후두암으로 투병하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하지만 지금 엔 어머니와 와이프와 세 딸들과 이제는 국가직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최고의 공무원으로 인정해 주는, 동료 소방관들이 있다.

    어버이 날이면, 언젠가 부모님과 하동 쌍계사로 벚꽃구경을 떠났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  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벚나무  밑에서 좋아하시던 막걸리 병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살아생전 내가 위험한 화재현장에서 다치기라도 할까 노심초사하셨을 아버지!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남은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며 사진 속에서처럼 환하게 웃고 계시면 좋겠다.

부모님과 함께 하동 화개장터에 벚꽃구경 갔을 때. 지금도 벚꽃철이 되면 막걸리를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올해 어버이날은 바빠서 찾아뵙지도 못하고 넘어갔지만, 가정의 달 오월이 가기 전에 아버지 묘소에 카네이션 한 다발과  막걸리 한 사발을 놓아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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