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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방관아빠 무스 Jun 27. 2021

길과 걷기

아침 동산에서(5)

   나에겐 몇가지 취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걷기'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걷기의 매력에 관해 찬양(?)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내에게 가장 와닿는 말은 걷기가 인생과 닮아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뭐니뭐니 해도 걷기와 가장 비슷하다. 차를 타고 간다면 그것은 인생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인생은 걷기처럼 자신의 육체로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타기와도 거리가 멀다. 인생은 천천히 관조하며 주위를 둘러보며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걷기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또 길이다. 물론 길이 없는 곳을 걸을 수도 있지만 걷는다는 것은 길을 전제로 한다. 곧은 길, 구부러진 길, 아스팔트, 흙길, 편평한 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길은 모두가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 직장으로 가는 길, 산으로 가는 길, 강으로 가는 길, 바다로 가는 길...


 

  물론 목적지가 없는 길도 있다. 그저 길 중간에서 걷기 시작해서 길이 채 끝나기 전에 내려오는 길, 난 취미로 그런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적지 없이 걷는 길, 그것이 진정한 취미로서의 걷기의 길이 아닐까? 어떤 목표, 목적지를 잡는다면 이미 그것은 취미로서의 걷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어떤 목적지를 따라 많은 길을 걸어왔다. 그것들은 대부분 취미로서의 걷기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부터 우리는 모두 길위에 던져진 존재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지금 우리 셋째처럼 겨우겨우 걷기를 익히기 시작해서 나의 모든 날들은 길 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유치원에 가던 길, 시장통을 지나고 모든 세상의 길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크게 느껴졌던 차도를 건너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유치원 선생님이 맞아주시는 유치원 입구에 들어섰을 때의 감격,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초등학교 입학해서 개나리 노오란 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학교로 가던 길, 그 길에서 나는 친구를 만났고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매력을 느꼈다. 중학교 올라가서 걸었던 산비탈 길, 학교는 산 중턱에 있었고 새로 산 가방을 어깨에 매고 바쁘게 걸었던 길, 학교에 늦을까 봐 노심초사했고 같이 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길이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길, 일명 푸시맨의 압박을 받으며 버스 안으로 안으로 몸을 구겨넣어야 했던 그 등교길은 지금 생각해도 등에선 진땀나고 입에선 단내나는 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의 치열한 경쟁의 길을 마치고 들어섰던 대학의 문, 같이 길을 걷는 이성이 생기고 낭만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길, 가끔 한데 모여 어깨동무 하고 걸었던 길,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꿈이 어느 순간 현실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 거라고 믿었던 길,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친구들은 내 옆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졸업이라는 나눠진 갈림길에서 서로의 길을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인생의 길을 돌고 돌아 누군 어떻게 살아간다더라는 풍문으로만 들을 뿐, 지금은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많다. 모두 자기의 길이 있고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할 뿐이라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아버렸다. 그 대신에 내 옆에는 나와 함께 종착지까지 같이 걸어줄 내 반려자와 내가 가지 못한 곳까지 나를 대신해서 가 줄 아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또 나 자신을 위해서 오늘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가끔은 발에 물집이 잡혀 쉬어야 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눈을 맞고 비를 맞으며 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 옆 벤치에서 꽃을 보며 열매를 맛보는 여유를 아직은 누릴 수 없다. 아직은 계속 앞만 보고 가는 길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취미로서의 걷기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길 중간쯤에서 들어가서 그 길이 끝나기 전에 빠져 나올 수 있는 길, 걷다가 좋은 풍경을 만나면 잠시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길, 친구와 같이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길, 나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오면서 그런 길을 걸어보기 간절히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갈림길에서 원래 계획했던 길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가 볼 수 있는 길, 그리고 그 길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나와서 반대편 길로 갈 수 있는 길, 그런 길을...



   오늘도 난 길 위에 서 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걸을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내게 남을 길을 걸어갈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바쁘게 걷는 도심속의 길이 아니라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 내 인생길이 그런 길이 되면 좋겠지만 아직 내 인생에서 아직 그런 길은 나오지 않았다. 잰 걸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살피며 가끔 누군가에게 추월당하고 가끔 누군가를 추월하면서 일단 눈에 보이는 목표를 향해 내딛는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되면 또다른 목표가 내 앞에 놓여지겠지,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하지만 최종 목적지가 어디일지 모르지만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 길 어디에선가 삶과 작별을 고하겠지만 이제 남은 길은 취미로서의 길처럼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되길 오늘도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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