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무렵의 편의점은 무척 아름답다. 이때쯤이면 취객들도 모두 집으로 가고 거리도 한산해진다.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씩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성희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블루투스 이어폰이라면 좋겠지만 아직은 줄 이어폰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행정법 강의는 언제 들어도 따분하다. 같은 톤, 같은 음성으로 들려오는 강사의 설명은 점점 성희를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
오베르의 교회-빈센트 반 고흐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뭐 하는 거냐구!"
누군가 출입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와서 성희에게 삿대질을 해댄다. 요즘 자주 오는 노가다꾼 아저씨다. 손에는 벌써 막걸리병이 들려있다. 어디서 1차를 하셨는지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이 시간에 온 걸 보니 오늘은 어디서 일을 했나 보다. 비 오는 날이나 일이 없는 날은 집에서 술 마시고 혼자 자는데, 일이 있는 날은 그날 받은 일당으로 진탕 취해서 편의점을 찾는다. 여기서 소주를 사 가서 집에서 또 마시려는 거다.그런데 문제는 자기는 손님이면서 점주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엉?, 여기서 쳐 자빠져 자고 있으면 어떡하냐구? 손님이 왔는데... 엉!"
거기다가 손님이라는 타이틀에 취해서 갑질까지 하려고 한다.
"아저씨, 뭐 사실 거예요?"
성희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원칙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다. 살 테면 사고 안 살 테면 나갈 테지... 하지만 그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 년이 지금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이 못생긴 것아!"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계산대 앞에 있는 막대 사탕들을 한 움큼 쥐더니 성희의 얼굴에다 대고 던졌다. 성희는 사탕을 얼굴에 맞은 아픔보다 '못생긴 것'이라는 소리에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닦았다. 아니,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래, 이년아, 지 못생긴 건 아나 보네, 얼굴도 못생긴 게 맘씨라도 고와야지!, 어디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난리야!, 손님 앞에서!"
성희의 눈물에 되려 기가 살았는지 그 노가다꾼은 삿대질을 해 가며 더욱 소리를 질렀다. 핏발 선 그의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성희는 말없이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112를 눌렀다. 처음에는 어디에 전화를 거는지 몰라 잠시 조용해졌던 그는 다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지금 경찰에 전화하는 거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는 성희의 핸드폰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과정에서 성희도 바닥에 쓰러졌다.
뒤집힌 게-빈센트 반 고흐
"일어나!, 이년아, 이년이 쇼하네, 야, 너 여기 씨씨티비 다 찍히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것은 성희가 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편의점 사정이나 이 바닥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인생의 제일 밑바닥에서 태어나 이 바닥에서 자랐고 이 바닥에서 늙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자신의 분이 안 풀리는지 그는 편의점 이곳저곳을 돌며 진열대를 부수고 물건들을 다시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성희를 때리지 못하는 분을 그것으로 풀려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성희는 바닥에 엎드러져 눈물만 흘렸다.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성희 아빠는 저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엄마와 성희를 때렸었다. 성희는 바닥에 엎드려 울면서 그때가 다시 생각났다. 무서워 바닥에 엎드려 울 수밖에 없었던 그때!
문이 열리고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 두 명은 편의점 안에서 물건을 부수며 행패를 부리고 있는 노가다꾼을 발견했다. 그리고 카운터 바닥에 누워 얼굴을 감싸고 있는 편의점 알바도...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하지만 경찰의 응대는 신중하고 젠틀했다.
"지금 저년이 쑈 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저거 완전 꽃뱀이라니까, 씨씨티비 틀어봐, 다 나오니까..."
경찰 앞에서도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쓰러진 성희를 힐긋 돌아보더니 그에게 말했다.
"저 학생 입에서 피가 나는데?, 그리고 여기 진열대도 망가졌잖아, 그냥 넘어가기가 어렵겠는데, 주민번호 한번 불러보시죠."
주민번호란 말이 나오자 술이 확 깨는지 노가다꾼의 태도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잰 혼자 넘어진 거야, 씨씨티비 돌려보면 알아, 그리고 여기껀 내가 해 주면 되잖아, 몇 푼이나 한다고..."
그리고는 카운터로 와서 뭔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야!, 너희 사장 전화번호 어딨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성희의 핸드폰을 이리저리 누르기 시작했다.
"여기 있네..."
그가 이렇게 성희의 핸드폰을 뒤져 사장과 통화를 하는 동안에도 경찰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엎드려 있는 성희 앞에 와서 눈물과 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한번 슬쩍 보았을 뿐이다.
"네, 모르는 사이도 아니구, 나도 이 근처에 사는데 좋은 게 좋다고 그렇게 넘어갑시다."
노가다는 한참을 그렇게 점주와 통화를 하다가 멈추고는 경찰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얘 사장하고 합의했으니까 별문제 없을 거야, 전화 한번 받아 보슈."
그리고는 노가다는 휴대폰을 경찰에게 건넸다. 경찰이 또 점주와 또 한참을 통화하는 사이, 어처구니없게도 노가다는 편의점 문을 열고 슬쩍 빠져나갔다. 하지만 경찰들은 통화가 끝나고도 멀뚱히 서서 그를 쫓지 않았다. 둘은 성희 쪽을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서로 뭐라고 수군거리면서 편의점 문을 열고 나갔다.
성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거울을 보니 아까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넘어지면서 그랬는지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물티슈 몇 장을 꺼내서 입술과 눈두덩이를 닦았다. 엉망이 된 머리도 새로 묶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핸드폰도 닦고 있을 때쯤 점주가 왔다.
점주는 성희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눈을 돌려 부서진 진열대와 내동댕이쳐진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미간에 주름지게 인상을 한번 쓰는가 싶더니 성희에게로 걸어왔다.
"어디 봐!"
그리고는 성희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러길래 저런 놈들하곤 엮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대거리를 하지 말라고!... 폭력을 쓰면 경찰을 부르라고 했잖아."
성희가 '저도 그렇게 했어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때, 그는 주머니에서 만원짜리 한 움큼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카운터에 놓으면서 말했다.
"이걸로 어디 가서 목욕이나 하고 밥이나 사 먹어, 오늘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똥 밟았다 생각하고 집에가서 쉬어, 출근은 낼 야간에 하면 돼!"
점주는 성희를 매우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점장의 손에서 나온 몇 장의 꼬깃꼬깃한 만원짜리를 보자 성희의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성희는 흐느끼면서 카운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도망치다시피 알바 조끼를 벗어놓고 출입문 쪽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점주는 기어코 따라와 돈을 성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모든 게 역겨웠다. 노가다도, 경찰도, 점주도... 어서 여길 빠져나가고픈 마음뿐이었다. 돈을 편의점 바닥에 내팽개치고 성희는 달렸다. 편의점 앞 개울을 따라 난 도로 위를 계속 달렸다. 도로 위의 가로등이 하나, 둘, 성희를 스쳐갔다. 가로등불이 성희의 눈물에 얼룩져 보였다. 성희는 개울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낮에 본 오리처럼 개울 위를 낮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깨엔 날개가 있을 리 없었다.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그러나 성희는 계속 달렸다. 노가다꾼이 했던 '못생겼다'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아팠다. 쭉 찢어진 눈, 하늘로 들린 들창코, 두툼한 입술까지... 그래서 경찰들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쑤근거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성희는 생각했다. 이런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니 꿈에 나올까 두려웠겠지... 점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한심하단 얼굴로 쳐다보았으니까, 주택가와 멀리 떨어진 편의 점 위치 탓에 지원자가 거의 없어 성희를 뽑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성희는 달렸다. 어릴 때부터 달리는 게 좋았다. 아이들 사이에선 달리기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선생님들 앞에선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체육시간엔 맘껏 달려본 적이 없었다. 이런 밤엔 달리기가 좋았다. 끝없이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는 데크길 위를 달렸다. 달리다 보면 모든 걸 잊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날아갈 듯한 느낌이 좋았다. 달리다 보면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이나 아까의 일도 금방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흰 유니폼을 입고 앞서 달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시간에 단체로 운동을 하다니... 그들을 스쳐 지나며 보니 하얀 유니폼이 꽤나 깔끔해 보였다. 같은 흰색이지만 때가 꼬질꼬질한 자신의 후드티가 비교될까 봐 성희는 빨리 그들을 뒤로하고 달렸다. 하지만 그들도 지지 않았다. 성희를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성희는 그들에게 따라 잡히지 않으려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고 나서야 성희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성희는 자기가 무언가를 흘린 줄 알았다. 그래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성희를 따라온 사람은 키가 크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30대의 남자였다. 그는 약간 숨이 가쁜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말했다.
"전 여자 육상 국가대표 코치 정우현이라고 합니다, 잘 뛰시네요."
그가 성희에게 명함을 주었다. 뒤따라온 여자 선수들도 모두 숨을 헐떡이면서 성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여기는 바레인 아시안게임 여자 마라톤 결승점입니다. 이제 드디어 서서히 선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의 이성희 선수와 일본의 쿠라사키 가즈 선수, 선두 그룹인 두 선수는 중반 이후로 각축을 벌이다, 이제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옵니다, 아!, 먼저 우리나라의 이성희 선수가 가즈 선수를 50미터 이상 앞서서 들어옵니다, 이제 한 바퀴!, 한 바퀴 남았습니다. 이대로 한 바퀴만 돌면 우승입니다."
"네. 42.195km를 달려온 이성희 선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지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에 반해 일본 선수는 매우 지쳐 보이는데요."
"그렇죠, 일본의 가즈 선수는 이성희 선수에 비하면 수준 차이가 좀 납니다. 이성희 선수는 세계기록에 근접하고 있습니다. 이 년 후에 열리는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이 유망한 선수죠."
"육상 시작한 지 3년밖에 안됐다던데 그렇게까지 발전을 했나요?"
"네, 타고난 신체조건에다 본인의 노력까지 더해져 지금은 월드클래스에 올라와 있는 선수죠."
"네, 말씀드린 순간, 이성희 선수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금메달입니다, 대한민국 금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