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 가기 전에 바다에 한번 가 보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말에 따라나선 지난 일요일, 코로나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있는 가족들에겐 좀 미안했지만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뿌리칠 수 없어 해운대에서 송정에 이르는 부산의 황금라인(gold coast?)을 따라 걷기로 했다.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까지는 원래 작은 철길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광용으로 모노레일과 해변열차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번 타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 좋은 산책길을 앉아서 보고만 가기엔 너무 아쉬워서 걷기 매니아인 우리는 '그냥 걷기'로 했다.
달맞이 언덕이 보이는 해운대 해변과 나
몇 개의 태풍이 스쳐간 탓일까?, 그날은 찌는 듯한 폭염도 한풀 꺾이고 하늘에는 적당히 구름이 끼여 걷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파도도 적당히 치고 있었고 너무 날씨가 좋아 우리는 수영복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하지만 해운대 백사장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코로나 방역 4단계에 접어든 부산의 7개 해수욕장 모두 폐장되었기 때문이다.(편의시설이 철수했을 뿐이지 수영은 할 수 있음) 텅 빈 백사장에는 모래 속에 묻힌 조개껍질들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해운대 해변의 조개껍질들-지난 여름의 추억도 여기에?
조금 더 걸어가자 백사장 끝자락에는 얼마 전 완공된 초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완공 전에는 해안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또 완공 후에는 태풍이 올 때 빌딩풍을 만들어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이 많았던 초고층 건물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운대 끝자락의 초고층 빌딩
해운대를 지나 미포 역에 접어드니 새로 생긴 모노레일(일명 스카이 캡슐이라고도 함)과 해변열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거기다 왼쪽에는 도보로 걸을 수 있게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렇데 세 가지 교통수단을 동시에 이용할 수 있으니 부산의 황금라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거기다 기차와 스카이 캡슐이 모두 노란색?~ㅋ)
제일 위쪽은 모노레일, 아래쪽은 해변열차, 그리고 왼쪽은 도보로 다닐 수 있는 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문인인 해운 최치원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 지은 해운대(海雲臺)는 오늘도 선생이 이곳을 찾은 천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바다 위의 구름이 멋들어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보며 걷다 보니 편도 4.8km의 길이 순식간에 끝나 있었다.
해운대에서 청사포 가는 길
마침내 우리는 청사포를 거쳐 송정 해변에 다다랐다. 청사포를 지날 때 날씨가 급격히 흐려져 소나기가 내렸다. 미쳐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빗속을 좀 걸었는데 그마저도 운치가 있었다.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를 둘러보고 도착한 송정해수욕장엔 해운대와 달리 많은 젊은이들이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청사포에서 송정 가는 길
송정에 도착하자 너무 비가 많이 내리는 바람에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지 못하고 우리는 버스를 타야 했지만 한나절 걷기 코스로는 정말 환상적인 황금 라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소식이 있었다. 짧게는 50년, 길게 봐도 100년 후엔 지구 온난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해서 이런 아름다운 부산의 황금라인이 바닷물에 잠길 수도 있다는 소식이었다.
영화 혹성탈출(1968)의 한장면
어릴 때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영화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그 영화는 원숭이 혹성에 떨어진 우주비행사 테일러가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결국 원숭이 혹성이 미래의 지구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내용이었다. 원숭이 혹성의 해변에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잔해를 발견하는 마지막 장면은 어린 시절의 내 기억 속에서도 정말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몇 백 년 후쯤엔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영화 속에서는 핵전쟁과 유인원의 진화로 인해서였다면 지금은 변이 바이러스의 창궐과 이상기후 때문이다. 변이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류는 점점 그 수가 줄어들어 해변은 텅 비게 되고, 이상 기후로 해수면이 높아지고 태풍 등 자연재난이 심해짐에 따라 인류문명이 완전히 파괴되는 그날이 앞당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신라 천년, 해운 최치원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해운대 바다를 걸었던 것일까? 천 년 후의 후손들이 이 바다를 보고 열광하리란 걸 알기라도 했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당장 내일 일도 알 수가 없다. 후손들에게 이 아름다운 부산의 황금라인을 고이 물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조차도 확실치가 않다. 그래서 단지 걸을 뿐이다. JUST W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