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간다는 것(13)
엊그제는 엄니를 모시고 엄니 집 근처에 있는 '치매안심센터'라는 곳을 다녀왔다. 설이 되기 며칠 전에 엄니 폰으로 거기서 전화가 한통 왔기 때문이다. 엄니가 고령이시고 하니 자기네 센터로 치매 검사를 받으러 한번 오시라는 내용이었다. 그 얘길 듣고 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치매가 정말 무서운 병이구나 하는 것과 우리나라가 그래도 나름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이었다.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이길래 나라에서 그렇게 미리미리(?) 치매검사를 해 준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재정이나 그런 것이 뒷받침돼야 할 텐데 그렇게 나라가 나서서 노인들 모두에게 해 준다는 걸 보니 우리나라가 아직은 그래도 희망이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 전화를 받고도 안 가면 엄니 건강에 너무 자신감을 갖는 것 같기도 해서 가긴 가야겠는데 설 전에는 모두가 그렇듯이 바빴다. 그래서 설이 끝나고 날이 풀어진 엊그제, 엄니가 신장투석을 받고 모시고 오는 길에 그곳에 들렀던 것이다.
차를 1층 주차장에 세우고 건물 2층에 있는 '치매안심센터'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런 홍보물(?)이 붙어있었다.
오호라, 부산광역시와 한의사회가 손을 잡고 500명의 치매 노인들에게 약침 및 한약을 무료로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림처럼 뇌에 침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우리 부산 좋은 부산이 아닌가? 울 엄니가 혹시라도 치매라면 저 500명 안에 들어서 약침 및 한약을 무료로....?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울 엄니는 치매가 아니어야 한다. 난 엘베를 내리면서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약침 및 한약이 암만 좋더라도, 내가 공짜라면 청산가리라도 마신다는 부산 싸나이긴 하지만 이건 아니다... 울엄니는 절대로 치매가 아니어야 한다. 아니어야 한다... 난 속으로 되뇌었다.
엘베를 내리자마자 흰 가운(?)을 입은 여자분이 엄니와 나를 보면서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난 얼마 전에 여기서 전화가 와서 검사를 한번 받아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분은 보호자 분은 여기 계시고 엄니만 자기를 따라오시라고 하면서 엄니를 '검사실'이라고 쓰인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부터 의자에 앉은 내 머릿속엔 별의별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엄니가 만약 치매라면? 일단 여기서 주는 약과 침을 맞아야겠지, 그리고 엄니의 옷마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놔야겠지, 그전에 일단 엄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야겠지, 그럼 방은 어디로?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먼저 검사한 노인 한분이 검사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나와 같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분의 가족들에게 흰 가운을 입은 다른 여자분이 이래 저래 설명을 하시는데 쫑긋 서 있던 내 귀에 들어온 단어는
'경도인지장애'
'집 안에만 계시고 활동을 안 하셔서'
'오랜 시간 tv 시청'
'정밀 검사'
등이었다. 설명을 듣는 가족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 울엄니도 병원 갔다 오시는 거 외에는 전혀 활동을 안 하시고 하루종일 텔레비젼만 보시는데 어쩌지? 치매는 아니라도 경도인지장애 판정이라도 나오면 어쩌지? 약과 침을 맞아야 하나? 내 머릿속엔 그런 생각들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엄니는 어릴 때 열병을 앓아 한쪽 눈이 거의 실명상태이시다. 그런 눈을 가지고 우리 가족을 위해 일생을 일하며 살아오신 엄니인데 나이가 들면서 여러 병을 더 얻으셨다. 한 십 년 전쯤에는 뇌경색이 와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원래는 수술을 해서 뇌혈관을 뚫어야 하는데 고령인 데다 신장도 안 좋으셔서 수술을 받지 못하셨다. 대신 머릿속엔 '뇌동맥류'라는 증상이 남아있다.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다. 그뿐만 아니고 몇 년 전에는 집에서 욕실을 나오다 넘어지셔서 허리에 압박골절이 왔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지만 그것 역시 아무런 조치를 못 하고 있다. 물론 고령과 신장투석 때문이다. 안 그래도 허리 디스크가 심해 걷기가 힘든 엄니는 압박골절 후유증으로 지팡이를 짚고 발을 거의 끌다시피 하며 다닌다. 그리고 오른쪽 귀에는 '진주종'이라는 것이 자라고 있다. 모양이 진주처럼 생겨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엄니의 청력을 떨어뜨리고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종양의 이름치곤 너무도 럭셔리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도 수술은 포기했다. 한 달에 한번 이비인후과를 방문해서 더 자라지 않도록 긁어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가끔 농담 삼아 엄니는 인간 '종합병원'이라고 했더니 엄니도 웃으셨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농담도 잘 안 한다. 정말 상황이 그러면 농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모두 감안하면 신장 투석하러 병원에 갈 때마다 내가 모시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머릿속에 복잡해져 가고 있는데 검사실 문이 열리면서 엄니가 지팡이를 짚고 발을 끌듯이 하며 나왔다. 뒤따라온 검사자 선생님(?)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검사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22점입니다, 40점 만점에..."
"네?"
나는 그 점수를 듣고 순간 긴장했다. 40점 만점에 22점이라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마도 나쁜 거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어르신들보다 점수가 좋은 편이에요, 치매나 경도인지 장애도 없고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상태입니다. 한 일 년 지나서 또 검사받으러 오세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그럼 그렇지, 엄니가 그래도 우리 집안의 각종 경조사 날을 다 꿰고 있는데 치매일 리가 없지...
"네,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긴장이 풀린 내 웃음에 그분도 따라 웃으셨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엘베를 타고 내려오는데 다시 엘베 안에 붙여진 홍보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약과 침은 다른 어르신에게 양보해야겠다. 그래도 또 하나의 짐은 더는 느낌이었다.
"엄니, 그래도 치매는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래, 그래도 그게 어디냐?"
엄니도 날 따라 웃었다. 치매안심센터를 나서는 길은 정말 안심이 되는 길이었다. '치매안심센터야, 일 년 후에 보자, 그때도 우릴 이렇게 안심시켜줘라...' 나는 차에 오르며 보이는 치매안심센터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실버힐링 센터와 치매안심센터라,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정말 잘 지은 작명센스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