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학교에 다니는 첫째가 코로나 19 확진자와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자가격리되었다. 첫째는 학교에서 특활활동으로 농구부에 같이 있던 남자애 하나가 확진자로 판명되는 바람에, 2시간 동안 그 애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밀접접촉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첫째는 같은 농구부이긴 하지만 남녀 따로 농구를 했기 때문에 같은 농구공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접촉도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심지어는 같은 농구부이긴 하지만 그 남자애는 잘 알지도 못한다며 억울해했다. 하지만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규정이 그런 걸...
첫째는 그날부터 14일 동안 집 바깥으론 나갈 수 없게 됐다. 학교도 가지 못하고 원격으로 하는 비대면 영상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셋째, 그리고 병설 유치원 교사인 아내까지 함께 동거가족이란 이유로 자가격리를 하게 된 것이다. 모두 검사 결과에서 음성이 나오긴 했지만 코로나 19 잠복기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네이버 블로그 펌)
이렇게 되자 우리 집에서 유일한 백신 접종자인 나만 자가격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집사람은 집안에서 중학생 하나, 초등학생 하나, 그리고 15개월 유아를 함께 건사해야 하니 내가 직장에서 다녀오면 나보다 더 피곤해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예민한 사춘기 여학생이 둘, 게다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좁은 방구석을 누비는 귀염둥이 하나를 함께 돌봐야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직장에서 다녀오면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며 파스를 붙여달라고 한다. 슬슬 여름이 시작되는 장마철에 하루 종일 집에 갇혀서 아이들 뒷설거지를 하다 보면
'여긴 어뒤?'
'난 누구?'
라는 실존적 물음이 뇌리를 스치고 대퇴부를 강타할 만 하다. 그래서인지 난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와이프의 심기부터 살핀다. 세 아이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있으면 일단 안심을 놓을 수 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가 제각각 자기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아빠가 왔는데도 나와 보지 않는다든지, 셋째의 울음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온다면 바짝 긴장을 해야 한다. 거기다 거실로 들어섰는데 아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모습만 보인다든지, 아니면 아기는 거실에서 울고 있는데 아내는 침실에 있다면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일단 울고 있는 아기를 안고 얼러주면서 침실로 들어선다. 집사람이 침대에 누워서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우리를 보고 있다면 그나마 아직 분위기 반전의 기회가 남아있다. 아기를 얼러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하고 엄마 품으로 토스를 해서 무사히(?) 안착하면 성공이다. 하지만 집사람이 반대쪽인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면 이건 시도해 볼 카드조차 없다. 일단 문을 닫고 나오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울고 있는 아기에게 바 나나를 먹이고 엄마 없이 애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밥 냄새에 시장끼를 느낀 집사람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집사람이 식탁에 앉아 차려놓은 자기 밥을 먹는다면 그날 저녁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밥을 먹고 기분이 풀린 집사람이 아기를 목욕시키면 모든 상황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나마(?) 평화로운 분위기의 네 여자
분위기가 좋다면 같이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 장마철에는 하루에 한 번씩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집사람이 자가격리가 되면서 그 일이 내 차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마트에서 뭐 사 올 게 없냐고 와이프에게 슬쩍 물어본다. 그걸 빌미 삼아 동네 마트까지 걷기를 할 수가 있어서다. 그냥 운동하러 나간다고 하면 와이프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사될 게 분명하다. 뭔가 사 올 게 있다면 그날은 횡재한 날이다. 보통 필요한 건 온라인에서 사기 때문에 마트엔 따로 갈 일이 없지만 당장 식료품이나 셋째의 이유식, 기저귀 등이 떨어졌다면 집사람은 내게 밖에 나가는 것을 허락한다. 아이들도 나 혼자 마트에 다녀오는 것에 불만이 많지만 자기들이 필요한 프린트 잉크라든지 A4 용지가 떨어졌다면 기꺼이 내가 밖에 나가게 해 준다.
"여보 빨리 와요, 주은이 목욕시켜야 하니까..."
"아빠,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오는 거 잊지 마요."
이렇게 나는 또 마트까지 왔다 갔다 하는 30분 남짓의 자유(?)를 얻었다. 물론 갔다 와서도 프린트에 잉크를 교체해줘야 하고 셋째가 목욕할 때 와이프를 보조해야 하지만 그래도 30분이 어디인가?, 하루 종일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세 딸과 집사람을 생각하면 감지덕지한 일이다.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가능성은 낮지만 첫째가 혹시라도 14일 이후에 양성이 나온다면 우리는 이런 생활을 얼마 정도 더 해야 할 것이고 어쩌면 병원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첫째가 14일 이후에 음성이 나온다면 우리는 다시 원래의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확진자, 밀접접촉자, 자가격리 14일... 이런 단어들이 한순간에 우리 가정을 덮쳐버렸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산책 삼아 마트에 가던 날이 그리워질 정도다. 공항이 폐쇄되고 음식점이 문을 닫을 때에도 해외여행도 잘 안 가고 외식도 잘 안 하는 우리 가족과는 먼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비상상황인 것이다.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비상상황...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섣불리 덤벼들었다간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경우를 난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려 한다. 불은 언젠가는 꺼진다. 중요한 것은 불에게 더 탈 수 있는 빌미 꺼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 빌미를 주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리다 보면 불은 저절로 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방역수칙을 더욱더 철저히 지키고 자가격리도 확실하게 해서 이 코로나란 놈이 우리 집에서 물러날 때까지 아빠의 역할을 다 할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