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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의 독박육아

아빠로 살아간다는 것(7)

by 소방관아빠 무스

이번 주 수, 목, 금요일은 셋째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방학이었다. 그리고 집사람이 교사로 다니는 유치원은 다음 주에나 방학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번 주 3일간 아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셋째를 보면서 밤에는 소방서 야간근무를 위해 출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독박육아, 독박육아,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야간엔 집사람이 애를 봤기 때문에 진정한 독박육아는 아닙니다, 진정한 독박육아를 하시는 분들께 죄송합니다 ~^^;;- 이렇게 3일간 온전하게 나 혼자 아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왜냐하면 첫째와 둘째 때는 집사람이 어린이집에서 일했기 때문에 애들을 같이 데리고 다닐 수 있어서 방학은 아무런 문제가 안되었기 때문이다.(어린이집은 신생아부터 다닐 수 있지만 유치원은 5살부터 다닐 수 있다.)


6e30c1b8b78060f86c47c212c7dbc37732b16183.jpg (사랑나무 어린이집 다음 까페 갈무리)

16살과 13살 두 딸을 둔 베테랑(?) 아빠에게도 집사람이 없는 낮시간 전부를 아이를 돌보며 지내야 하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소방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더욱 힘이 들었다. 기저귀를 가는 일이나 밥을 먹이는 일은 십 수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어떻게 해보겠지만 아이를 따라다니면서 계속 놀아주어야 하는 일은 '젊은 아빠' 때는 몰랐던 내 육체의 한계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폭염이 지속되었던 이번 주, 아이는 답답한 집안이 싫은지, 자꾸 밖에 나가 놀자고 졸랐지만 뜨거운 땡볕에 아이를 섣불리 데리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언니들에게 동생을 맡길 수도 없었다. 첫째는 아직 방학이 시작되지 않았고 둘째는 학원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그만한 언니들이 있으면 막둥이는 다 키워줬을 거라고 아쉬워했더니 집사람은 요즘 그런 얘기하면 꼰대 소리 듣는다고, 옛날 얘기하지 말라며 나에게 면박을 줬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군대 시절의 명언(?)을 되새기며 3일간의 독박육아의 세계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첫째 날은 아침부터 셋째가 밥을 안 먹으려고 했다. 구슬리고 다독여서 겨우 밥을 다 먹이고 나자마자 말도 못 하는 녀석이 컴퓨터 앞에 가서 유튜브 유아 동영상을 틀어달라고 '응!, 응!' 소리를 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겨우 십육 개월이지만 컴퓨터로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맛을 벌써 알아버린 것이다. 다른 것에는 3초도 집중을 못하지만 그걸 틀어주면 30분이고 1시간이고 집중해서 본다. 하지만 집사람은 벌써 그런 것을 틀어주는 것을 싫어했고 나도 아이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셋째를 과자로 꼬드겨 아파트 앞 놀이터로 데리고 나갔더랬다. 오전에, 그나마 선선할 때 아파트 놀이터에서 좀 놀아주려고 한 것이다. 아이는 놀이터에 있는 시소와 미끄럼틀을 타다가 어떤 남자애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우리 셋째와 나이대도 비슷한 것 같아,


"어? 친구 왔네, 친구!, 친구야 놀자~"


라며 아는 체를 했다. 셋째도 '어!, 어!' 하며 그 애를 아는 체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 애는 우리 애와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남자애였다. 나는 몰랐는데 그 애 엄마가 꺼낸 휴대전화에 보니 우리 셋째와 그 남자애가 어린이집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둘은 시소를 같이 타며 깔깔대며 어울렸다. 나는 그 애 엄마와 같이 근처 벤치에 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자기도 어린이집 방학 동안 어떻게 아이를 돌봐야 되나 걱정되어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요즘 말하는 '육아 동지'를 얻은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나절이 훌쩍 지나 아이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그 아이와 엄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셋째를 방안에 눕혔다. 아이는 한참을 자다가 기분 좋게 일어났고 그렇게 첫날은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시소야, 움직여라~뾰로롱~^^

둘째 날은 날이 너무 더워 놀이터에 나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너자이저인 우리 딸은 집 안에만 있기 답답했는지 자꾸만 현관에 나가 자기 크록스를 신겨달라고 징징거렸다. 그날은 작전을 바꿔 집 앞에 있는 마트에 가기로 했다. 아파트와 마트가 연결된 연결통로를 통해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시켜줬더니 셋째는 기분이 좋은지 발을 까딱까딱하며 유모차에 잘 앉아있었다.(방역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마스크도 씌우고 돌아와서는 손도 깨끗이 씻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형마트에 간 우리 셋째는 처음에는 많은 물건과 넓은 매장에 기가 죽었는지 바닥에 발이 붙은 듯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내가 녀석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자 슬슬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판매 코너에 있는 판매원 여사님들이 자기를 보고 '안녕'하며 웃으며 손인사를 하자 나중에는 혼자서 마트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손님이 별로 없는 오전의 넓은 마트는 녀석에게 좋은 놀이터였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아이는 집에 돌아오자 피곤했는지 또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났고 둘째 날의 작전도 대성공이었다.


이 동네 패셔니스타는 나?~^^

셋째 날은 거저먹기였다. 첫째가 학교에서 방학을 했고 둘째는 코로나 때문에 학원이 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언니들이 비눗방울 장난감을 사 와서 셋째를 데리고 놀러 나간 덕분에, 나는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두세 시간이 지나 언니들과 돌아온 셋째는 얼마나 열심히(?) 놀았던지 양 볼따구니가 벌겋게 익어있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또 두세 시간의 낮잠을 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흐음~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나는 이렇게 3일간의 독박 육아를 무사히 넘겼지만 요즘 뉴스들을 보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일들이 많이 보인다. 아이를 방치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엄마,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이를 떨어뜨리려 한 엄마,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학대한 보육교사... 결론적으로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엄마 혼자의 일도, 아빠 혼자의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온 가족이 나선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않는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정말로 온 마을이 나서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개인화되고 도시화된 사회에서 엄마, 혹은 아빠, 아니면 가족에게 독박육아를 강요한 결과, 점점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아닐까?(한국의 21, 22년 예상 출산율은 각각 0.7명, 0.6명으로 지구 상 198개국 중 꼴찌인 198위이다. 20년에는 대표 저출산 국가인 일본의 1.37명에 크게 뒤지는 0.84명을 기록하였다.)


우리가 어릴 때는 애를 본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제 발로 서서 걷기만 하면 애들은 스스로 나가 뛰어놀다가 밥 먹을 때, 혹은 해가 져서야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사이엔 친구들이, 아니, 온 동네가 그 아이를 보살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친구와 놀다가 친구네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낮잠도 자고 그 집에서 실컷 놀다 왔다. 그때는 동네 누구누구 하면 다 아는 아이였고 다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친구들도, 그런 동네도 사라졌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집 밖은 위험구역으로 변해버린다. 그러기에 엄마는 아이를 온종일 혼자 안고 있을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야 하지만 그나마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래서 독박육아가 시작되고 이런 가슴 아픈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마음 편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이며, 또 돌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온 동네가, 사회가, 국가가 나서야 한다. 예전처럼 동네 사람들을 모두 알고, 그들이 내 아이를 자기 아이처럼 돌봐 주기를 기대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를 마음 편히 내 보내고 맡길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되고, 그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마음 놓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나도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데 힘을 보태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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